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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밀과참 Jul 26. 2023

14곡을 연달아 열창하다

  급작스럽게 내린 소나기에 허둥대다가 알바가 있는 친구 먼저 보냈다. 내겐 설빙 빙수 픽업이란 임무가 남았는데 대기 손님이 얼마나 있을지 모르는지라 홀로 갔다. 투명문을 당기기 전, 지역 화폐 카드를 꺼내려는데 그 카드만 보이지 않았다. 네 컷 사진 찍는 곳에 두고 왔구나! 왔던 길을 서둘러 돌아갔다.


  카드를 챙기고 똑같은 길을 걷다 보니 이 건물에도, 저 건물에도 노래방 간판이 달린 게 눈에 띄었다. 혼자 코노에 가고 싶단 마음을 언제 먹었는지, 하도 오래돼서 나 또한 잊고 있었는데 드릉드릉 마음에 시동이 걸렸다. 빙수를 기다리는 가족에게 양해 연락을 취한 후 설레하며 노래방이 있는 층 번호를 눌렀다.


  아쉽게도 이 건물의 노래방은 영업을 시작하지 않아 저 건물로 들어서서 코인노래방이라 떡하니 적힌 공간에 입장했다. 현금이 없는 터라 사장님이 안 계실까 봐 걱정했는데 출입과 동시에 눈이 마주쳐서 송금드리고 아무 방에나 들어갔다. 방에 딱 들어가는 순간 쾌쾌한 땀냄새가 코를 강타했지만 노래방에서 중요한 건 목 아닌가. 후각이야 금방 괜찮아지리란 생각에 마이크부터 잡았다.




  천 원은 너무 적고, 3천 원은 내가 아쉽고, 만 원은 가족에게 한 대 이상을 맞을 테니 5천 원을 썼다. 시간이 뜨길 기다리니 '00'이란 숫자가 '15곡'으로 바뀌었다. 코노에 안 온 지 한참 돼서 시스템을 까먹은 건지, 코노마다 다른 건지 헷갈렸다. 홀로 온 나에게는 '오히려 좋아'였다. 노래 찾기에, 예약에, 열창까지 혼자 해야 하는데 시간으로 주어졌다면 약간 손해 보는 기분이었으리라.


  혼자 부르니 간주 점프도 하지 않았는데, 내가 알던 곡들의 노래방 버전 간주는 그 나름의 매력이 있어 보여 재밌었다. 15곡이 아니라 14곡을 열창한 까닭은 '닫기' 버튼을 누르고 '시작'을 눌러야 하는데, '시작'을 누르는 바람에 생뚱맞은 곡이 흘러나오고 말았다. 한 곡은 곧장 취소해 버렸다는 뜻이다. (칠칠이 어디 안 간다.)


  14곡 중 우리나라 노래가 하나도 없어서 머쓱하긴 하다. 모국어를 사랑하기에 글쓰기에도 흥미를 품은 거라 모국어 박애자는 결코 아니다. 한국 노래야 친구들과 있을 때 언제든 부를 수 있으니, 홀로 집에 있을 때마다 열창하기 바빴던 타국가들의 노래로만 쏙쏙 고른 거다.


  7곡까지 한 국가의 노래만 부르다가 변화를 주기 위해 영어 노래도 한 곡 불렀는데 박자를 다 틀려서 도로 돌아왔다. 15란 숫자가 떴을 때 다 채울 수 있을지 미심쩍었는데, 어떤 노래를 택할까 고민한 순간은 짧디 짧았다. 박자며 가사 틀리기 바빴던 것도 영어 노래 한 곡뿐이었다. 이 정도면 제2 언어 맞는구나 싶어, 전공자로서 안도의 숨을 내쉬기도 했다.




  오늘의 개운함은 잊지 못하리. 백수 주제에 5천 원이라는 거금을 쓴 건 지금도 마음에 찔린다. 양심의 가책으로 집까지는 걸어갔고(그 때문에 빙수가 녹았으니 좋은 선택은 아니었다), 가는 길에 용돈 조달자인 아빠에게 전화를 걸어 노래방에 다녀온 사실도 고했다. 그거면 됐다.


  백수가 된 후로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는 나, 칠칠이는 오늘은 꽤나 신나 봤다.

  (양귀자 작가님의 '모순'을 좋아하시는지요. 진진이가 "나, 안진진은"이라 말하는 걸 따라 해 봤습니다.)

힙합 언니, 힙한 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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