급작스럽게 내린 소나기에 허둥대다가 알바가 있는 친구 먼저 보냈다. 내겐 설빙 빙수 픽업이란 임무가 남았는데 대기 손님이 얼마나 있을지 모르는지라 홀로 갔다. 투명문을 당기기 전, 지역 화폐 카드를 꺼내려는데 그 카드만 보이지 않았다. 네 컷 사진 찍는 곳에 두고 왔구나! 왔던 길을 서둘러 돌아갔다.
카드를 챙기고 똑같은 길을 걷다 보니 이 건물에도, 저 건물에도 노래방 간판이 달린 게 눈에 띄었다. 혼자 코노에 가고 싶단 마음을 언제 먹었는지, 하도 오래돼서 나 또한 잊고 있었는데 드릉드릉 마음에 시동이 걸렸다. 빙수를 기다리는 가족에게 양해 연락을 취한 후 설레하며 노래방이 있는 층 번호를 눌렀다.
아쉽게도 이 건물의 노래방은 영업을 시작하지 않아 저 건물로 들어서서 코인노래방이라 떡하니 적힌 공간에 입장했다. 현금이 없는 터라 사장님이 안 계실까 봐 걱정했는데 출입과 동시에 눈이 마주쳐서 송금드리고 아무 방에나 들어갔다. 방에 딱 들어가는 순간 쾌쾌한 땀냄새가 코를 강타했지만 노래방에서 중요한 건 목 아닌가. 후각이야 금방 괜찮아지리란 생각에 마이크부터 잡았다.
천 원은 너무 적고, 3천 원은 내가 아쉽고, 만 원은 가족에게 한 대 이상을 맞을 테니 5천 원을 썼다. 시간이 뜨길 기다리니 '00'이란 숫자가 '15곡'으로 바뀌었다. 코노에 안 온 지 한참 돼서 시스템을 까먹은 건지, 코노마다 다른 건지 헷갈렸다. 홀로 온 나에게는 '오히려 좋아'였다. 노래 찾기에, 예약에, 열창까지 혼자 해야 하는데 시간으로 주어졌다면 약간 손해 보는 기분이었으리라.
혼자 부르니 간주 점프도 하지 않았는데, 내가 알던 곡들의 노래방 버전 간주는 그 나름의 매력이 있어 보여 재밌었다. 15곡이 아니라 14곡을 열창한 까닭은 '닫기' 버튼을 누르고 '시작'을 눌러야 하는데, '시작'을 누르는 바람에 생뚱맞은 곡이 흘러나오고 말았다. 한 곡은 곧장 취소해 버렸다는 뜻이다. (칠칠이 어디 안 간다.)
14곡 중 우리나라 노래가 하나도 없어서 머쓱하긴 하다. 모국어를 사랑하기에 글쓰기에도 흥미를 품은 거라 모국어 박애자는 결코 아니다. 한국 노래야 친구들과 있을 때 언제든 부를 수 있으니, 홀로 집에 있을 때마다 열창하기 바빴던 타국가들의 노래로만 쏙쏙 고른 거다.
7곡까지 한 국가의 노래만 부르다가 변화를 주기 위해 영어 노래도 한 곡 불렀는데 박자를 다 틀려서 도로 돌아왔다. 15란 숫자가 떴을 때 다 채울 수 있을지 미심쩍었는데, 어떤 노래를 택할까 고민한 순간은 짧디 짧았다. 박자며 가사 틀리기 바빴던 것도 영어 노래 한 곡뿐이었다. 이 정도면 제2 언어 맞는구나 싶어, 전공자로서 안도의 숨을 내쉬기도 했다.
오늘의 개운함은 잊지 못하리. 백수 주제에 5천 원이라는 거금을 쓴 건 지금도 마음에 찔린다. 양심의 가책으로 집까지는 걸어갔고(그 때문에 빙수가 녹았으니 좋은 선택은 아니었다), 가는 길에 용돈 조달자인 아빠에게 전화를 걸어 노래방에 다녀온 사실도 고했다. 그거면 됐다.
백수가 된 후로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는 나, 칠칠이는 오늘은 꽤나 신나 봤다.
(양귀자 작가님의 '모순'을 좋아하시는지요. 진진이가 "나, 안진진은"이라 말하는 걸 따라 해 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