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린 독립 11
30살이 넘으니 나에게 '우리 집'은 '부모님 집'이 되었다.
나, 동생, 엄마, 아빠 이렇게 네 식구 다 같이 살 때는 당연히 이 집이 내 집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시간이 흘러 20대 후반부터 동생이 독립해서 나가 살다 결혼을 하고, 내 작은 사업들을 오픈했다 정리하며 짐을 집으로 여러 번 끌고 들어오면서 우리 집에 사는 것이 점점 눈치가 보이기 시작했다.
"밥 먹고 나면 바로바로 설거지하라고 했지?! 집에서 밥 얻어먹으면서 이것도 제대로 안 해? 나가서 살아봐 누가 이런 거 해주나."
"베란다 나가봐, 아주 네 짐으로 한가득이야. 으휴 진짜. 싹 갖다 버려버려야지. 그러니까 너는 무슨 장사를 한다고. 장사가 쉬운 줄 알아?"
"00네 집 딸은 번 돈에서 백만 원씩 엄마 준다더라. 딸이 가장이더라 가장. 나는 언제 생활비 한 번 받아보나. 우리 집도 그럴 날이 있으려나 몰라. "
엄마의 구박 아닌 구박을 들어도 아무렇지 않은 척 뻔뻔한 척 무시했지만 마음에 계속 그 말들이 쌓여갔고 눈치를 더 보게 만들었다.
그리고 부모님과 함께 사니 나도 부모님도 서로 불편한 점이 많았다.
첫 번째로 부모님과 생활리듬이 많이 달랐다. 새벽에 일찍 일어나고 저녁에 일찍 주무시는 부모님과 출근과 퇴근이 모두 늦어 늦게 자는 내가 서로 조심해야 했다. 잠을 더 자고 싶어도 새벽부터 들리는 출근 소리에 뒤척일 수밖에 없었고, 늦게 퇴근하면 9시부터 자고 있는 부모님을 조심해 조용히 밥을 차려 내 방에 들어가 먹어야 했고, 밤에는 샤워도 편하게 하기 힘들었다.
두 번째로 마음 편히 쉬기가 힘들었다. 건축일을 하는 아빠는 일을 하지 않는 시즌에는 한 두 달이고 집에 있었고, 쉬고 싶으면 쉬기 때문에 집에 있는 일이 많았다. 쉴 때는 하루 종일 거실을 차지하고 계속 티브이만 보는 아빠가 어쩔 수 없이 신경 쓰이고 불편했다.
그러다 보니 내 방에서 생활을 많이 했고, 화장실 빼고 모든 걸 해결했던 내 방은 원룸 같은 작은 집이었다. 일러스트레이터로 활동할 땐 2평도 안 되는 내 방에서 밥도 먹고, 그림도 그리고, 운동도 하고, 잠도 자고, 일도 했다.
일을 다닐 때는 더 불편했다. 주말에라도 집에서 늘어져 아무것도 하지 않고 쉬고 싶은데 아빠가 있으면 우선 늦잠을 잘 수 없었다. 아빠 밥을 끼니마다 차려줘야 하니 온전히 내 시간으로 쓸 수 없다. 문을 닫고 내 방에 있어도 하루 종일 들리는 티브이 소리로 머리가 아팠다. 그래서 돈이 없으면 시간을 때우러 세 시간이고 네 시간이고 걸으며 여기저기를 돌아다녔고, 돈이 있을 땐 스터디 카페에서 그림을 그리고 아프면 만화카페에 누워 있었다.
스스로 이젠 내 집이 아닌 것 같다고 느끼고, 살면서 겪은 불편함이 독립을 더 생각나게 했던 것 같다.
내 집을 마련해 이사한 첫날, 이제부터 나 혼자 사니 좋을 것 같았지만 마냥 그렇지만도 않았다. 어수선한 새로운 집에 혼자 덩그러니 있으니 기분이 낯설고 어색했다. 집의 모든 것이 낯설었지만 그중에서도 제일 낯설었던 건 잠자리였다.
미리 주문을 했어도 인터넷으로 주문한 가전, 가구들은 딱 시간 맞춰 도착하지 않았다. 가전과 가구들이 이가 숭숭 뚫린 것처럼 중구난방이었다.
방에는 옷장과 침대가 들어갈 예정이었지만 옷장과 침대 프레임이 안 온 상태에서 매트리스만 왔다. 매트리스를 씌울 커버도 안 와서 방에는 생 매트리스 하나만 덩그러니 있었는데 그 방에서 잠을 자야 했다.
거실에서 밍그적거리다 늦은 밤이 돼서야 방에 들어가 자려는데 인터넷도 아직 설치가 안 돼서 핸드폰도 못하고 멀뚱멀뚱 매트리스 위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니 이리도 어색할 수가!
새로운 동네의 낯선 집... 낯선 방 구조에 낯선 천장과 벽지 색과 전등. 미끌거리는 매트리스 질감과 전에 잤던 푹신한 침대와는 다른 쿠션감. 커튼이 없어서 새어 나오는 밖의 은은한 불빛, 예전 집보다는 더 잘 들리는 길 가의 차 지나가는 소리까지. 예전부터도 놀러 가서도 잠자리가 바뀌면 잠을 거의 못 잤는데 아무리 내 집이라고 해도 평생 열 번도 안 온 집에 혼자 잠을 자려니 주변 모든 것이 다 신경 쓰였다.
뒤척이다 도저히 잠이 오지 않아 일어나서 이불을 끌고 거실 소파에 가서 누웠다가 그래도 안 되겠어서 다시 방으로 들어가길 반복.. 그 뒤로도 계속 뒤척거리다 늦은 새벽이 넘어서야 겨우 잠이 들었다.
그렇게 잠을 들고 얼마나 지났을 까, 얼굴로 쏟아지는 빛 때문에 알람이 울리기도 전에 눈을 떴는데 주변이 빛으로 가득했고 주변은 너무나 고요했다.
이렇게 쭉 잠을 잔 건 참 오랜만이다. 푹 잠을 잔 게 얼마만인지. 이런 평화로움이 매일 찾아오는구나. 눈치 보지 않고 이 적막과 휴식이 온전히 내 것이란 게 감동이었다.
거실 소파에 앉아 따뜻한 물 한잔을 마시며 멍하니 앉아있으니 이제야 실감이 났다.
아, 이 집에선 얹혀사는 기분은 안 느끼겠구나.
눈치 보지 않아도 되고. 주말엔 푹 쉬어도 돼.
나 진짜 쉴 수 있는 집이 생겼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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