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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지랄 떠는 딸년이 된 이유(4)

느린 독립 09

by 삼각커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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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생인 나는 어느 때와 다를 것 없는 조용한 아침에 눈을 떴다.

내 방 침대에 누워 한참을 눈을 깜박이며 이곳이 현실임을 깨닫는다.


그래, 어제 부모님이 크게 싸우셨지.


어젯밤의 휘몰아치는 절망과 쏟아지는 소리들이 모두 가라앉아 적막한 집은 몇 시간 전 그 공간이 맞나 싶게 기묘하게 평온하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차분히 햇살이 소파며 식탁 모두 뜨뜻하게 데워지고 있다. 그러니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온 것 같아 확 안심이 된다. 어제 일이 무슨 상관이냐 싶게 그냥 이대로 괜찮고 싶다.


우리 가족은 어제의 소란은 침묵한 체, 모두가 아무 일 없다는 듯 또 멀쩡한 척하는 하루가 시작된다.


그러니 평범한 하루를 지나 다시 저녁이 되어 집으로 돌아갈 때면 어젯밤이 떠올라 심장이 자꾸만 두근거렸다. 버스정류장에서 최대한 앉아 시간을 벌다 집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은 발목에 쇠고랑을 채워 끌고 가듯 무거웠고, 집 앞에서는 항상 숨이 막혔다. 그 어린 나이에 내가 갈 곳이 있나, 결국 머물 곳은 집뿐인데 아슬아슬한 집 안 분위기를 도둑고양이 마냥 살피며 집으로 들어가면 제발 시간이 빨리 가 나이가 들고 싶었다. 어른이 되고 싶었다. 부모님도 빨리 늙었으면 좋겠었다. 다 같이 늙고 늙다 죽으면 이 지옥도 끝이 나겠지.


아무렇지 않은 듯 살고 있다고 해서 정말 아무렇지 않은 건 아니다.


지금의 평범한 일상이 너무 '평범'해서, 평범하지 않았던 날들을 그대로 기억하고 살기엔 '평범'은 너무나 '평온'하다. 이 감정만 내 삶으로 인정하고 싶어서 악몽 같은 밤들은 내 것이 아닌 것처럼 군다. 아무 문제 없이 평범한 집에 행복하고 사랑받고 자란 사람인 척을 한다. 어두운 감정은 다른 사람들에게 숨기며 밝은 척을 하고, 집에 오면 납작 엎드려 아빠에게 순종하는 척을 한다. 내 평범함을 지키기 위해 내 감정을 누르고 숨기면서 얻게 되는 건 무력감뿐인 것 같다.


내가 받은 상처 같은 건 다 잊고 아무렇지 않아 진 당당한 어른이 되었다고 나조차도 착각을 한다. 그런데 가끔 아주 얇게 포장해 둔 것 같은 내 평범함이 작은 사건으로도 쉽게 찢어질 때마다 나는 좌절한다. 내 평범함은, 내 평온은 이리도 허접하고 조잡하구나. 그리고 이런 조잡한 나를 발견할 때마다 우리 집을 자꾸만 원망하게 된다.


왜 나는 작은 갈등에도 가슴이 두근거리고 내 의견을 말하지 못할까?

왜 나는 다른 사람 눈치를 보고 스스로 작아지는 걸까?

왜 나는 목소리 큰 남자에게 기가 죽고 큰 소리에도 깜짝깜짝 놀라는 걸까?



내 마음속 작은 태클들이 나를 멋없게 만들 때마다 혐오감이 밀려온다. 이 마음들 쌓이고 싸여 요즘은 자꾸만 화가 난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벌벌 눈치를 보며 웅크리고 있는 마음속 작은 내가 느껴질 때마다 나를 혐오하고 부모님을 원망하며 한탄만 했는데 말이다. 머리가 굵을 대로 굵어져서 인가, 이제는 내 밥 벌이는 해 먹고살아서 인가, 착한 딸 역할을 포기해서 인가. 모르겠다. 목구멍까지 뜨거운 덩어리가 솟아오르고 눈이 뜨거워진다. 마음속에 개지랄 병이 돋아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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