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린 독립 08
나는 지하철 안에 들어가자마자 이상한 느낌이 드는 사람을 잘 캐치한다. 그 사람이 무슨 행동을 했든, 안 했든 무조건 그 근처는 피하는 편이다. 거리에서 조금이라도 나쁜 느낌과 억양의 시끄러운 소리가 들리면 나도 모르게 반응하고 사태를 파악하고 피해 돌아간다.
나같이 위험을 감지하는 예민한 감각을 갖고 있는 사람들을 나는 여럿 알고 있다. 나와 같은 사람들은 보통의 상태에서 묘하게 다른 '이상한 분위기'를 감지하는 레이더가 발달해 있다. 다른 일을 하고 있어도 위험과 불란, 싸움의 징조를 기가 막히게 잘 캐치한다.
잘 캐치한 다는 것은 그런 상황에 민감한 것이고, 어떻게 생각하면 많이 겪어봤는 이야기도 된다. 이상한 기류를 내뿜는 사람의 태도는 시야 끝 가장자리에서도 그 기운이 느껴진다. 독이 서린 시선이나 거칠고 불규칙한 숨소리, 바르지 못하고 거친 발걸음... 행동의 미묘한 변화의 데이터를 많이 쌓아 놨고 그걸 위험이라 느꼈기에 반응이 빨라진 것이다.
내 지랄 같은 딸년 모드가 발동한 그날은 평상시와 비슷한 듯 공기가 달랐던 저녁이었다.
내가 퇴근하는 저녁시간. 그 시간이면 엄마가 티브이를 보고 있거나 나를 보고 인사라도 하려고 나와보기라도 하는데 그날따라 엄마가 아무 소리도 없이 조용히 침대에 누워있었고, 일찍 퇴근한 아빠는 집에 흔적은 있지만 베라다에 소리가 나는 걸로 보아 담배를 피우러 나간 상태였다.
바쁘게 하루를 보내고 지친 내가 화장실에서 물에 젖을까 슬리퍼를 안쪽으로 밀어 두고 발만 씻고 나와 거실에서 쉬고 있었는데, 담배를 피우고 온 아빠가 화장실을 보더니 엄마와 나를 집합시켰고 위와 같은 상황이 펼쳐진 것이다.
화목한 집이라면 나도 웃으며 사과하고 넘어갈 문제를 저렇게 예민하게 반응했을까 싶은데, 돌이켜 생각해 봐도 애초에 화목한 집이 저런 일로 저렇게 잡도리를 했을까 싶다.
내가 부여하고 싶지 않아도 우리 집 최대 권력은 자연스레 아빠에게로 흐르게 되어있다. 아빠 명의의 집에서 살고, 아빠가 벌어 온 돈으로 생활하는 상황에서 아빠가 하는 말의 힘은 '가장'이란 이름하에 강력해진다. 더구나 가부장적이고 집에서라도 권력을 누리고 싶어 하는 아빠의 성격에 우리 집은 옳고 그름을 불문하고 아빠의 명령은 절대적으로 받아 들어야 하는 독제정권처럼 살아왔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고 나도 30대 중반이 넘었고 부모님도 60이 훤씬 넘었다. 이미 늙고 늙어 생기라곤 다 빠져 푸석한 늙은이가 되어가는 아빠. 그런데 난 아직도 이런 사건이 터질 때마다 어찌 보면 삶에 찌들어 애처롭기까지 한 내 눈앞의 이 남자가 한순간에 어릴 때부터 나를 괴롭혔던 공포스럽고 무시무시한 존재로 보인다. 그리고 평생을 이런 상황과 당연한 듯 받아들이며 숨죽여 사는 내가 혐오스러워진다.
오늘 상황을 앞뒤로 파악해 보니, 일찍 오후 4시 정도에 회사에 다툼이 있어 일찍 퇴근한 아빠가 오자마자 집안을 다 뒤집고 마음에 들지 않는 집 살림 상태 찾아 엄마에게 계속 시비를 걸었다고 한다. 저녁까지 계속 술을 마시고 있었고 거기다 내가 슬리퍼를 자기가 정한 규칙에 맞게 두지 않았으니 나까지 혼낼 구실이 잡힌 것이다.
30대 중반 들어 내 살길 찾느라 바빴고, 집안은 대체로 평화로워 이 불안감을 잊고 있었다. 항상 집에 들어갈 때면 불안해하며 분위기를 살 피던 어린 시절의 내가 생각나 안압이 오르고 뒷 목이 뜨거워졌다. 어찌 보면 내가 슬리퍼를 안쪽에 둔 거니 그냥 할 수도 있는 '죄송하다'는 말이 마치 내 몸에 억지로 한 부분을 스스로 잘라내는 것처럼 하기 싫었다. 엄마는 지칠 대로 지쳐 나에게 빨리 죄송하다고 말하라고 압박을 줬고 나도 일이 더 커지기 싫어 죄송하다고는 했지만, 엄마의 사정에 억지로 죄송하다고 한 나도, 억지로 한 말을 들은 아빠도 둘 다 이 결과에 성이 차지 않았다.
아빠는 그 뒤로도 베란다와 아빠의 방, 엄마의 방, 거실을 오가며 온갖 욕을 하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문을 발로 차며 3시간 넘게 소란을 피웠고 나는 이 소란을 아직까지 겪어야 한다는 게 분하고 분했다. 그리고 내 과거와 현제와 미래가 너무 절망스러워 미치도록 화가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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