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린 독립 12
1인 가구가 제일 성가시고 힘든 부분은 뭘까? 빨래? 분리수거? 청소?
아니다.. 나를 제일 힘들게 하는 건 다름 아닌 '밥'이다!
혼자 살면 엄마보다 더 야무지게 내 살림을 잘해 내리라 자신만만했다.
부모님 집에 살 때에도 부모님과 생활하는 시간대가 맞지 않아 대부분 내 밥은 내가 차려먹었다. 아침은 간단히 집에 있는 과일을 먹거나 굶었고, 저녁에 와서는 집에 있는 재료로 요리를 해 먹거나 집에 들어오면서 포장한 음식을 먹었다. 나는 부모님 집에서 살지만 엄마가 밥을 차려주는 날이 거의 없어서 엄마에게 손 벌리지 않고 나름 스스로 잘해 먹고살고 있다 생각했다.
앞선 <혼자 살면서 느끼 요즘 물가> 에피소드에서 처럼, 독립 후 내 살림에 대한 로망이 한가득이었다. 혼자 사는 사람들의 유튜브를 보며 나도 저렇게 장 봐와서 예쁘게 해 먹고, 재료 야무지게 소분하고, 계획적으로 그럴싸한 메뉴 짜서 해 먹어야지. 낭만에 부풀었지만 미친 물가에 놀라고 식사에 소비되는 시간과 에너지에 두 번 놀랐다.
내가 그나마 부모님 집에서 혼자서 이것저것 해 먹을 수 있었던 건, 집에 넘쳐날 정도로 준비되어 있던 식재료와 밑반찬들, 미리 해 둔 밥이 있었기 때문이다.
일을 하고 집에 오면 저녁 8시라 있는 재료로 요리를 하고, 상 위에 음식을 차려서 먹고, 먹은 걸 치우고 설거지를 하고, 음식물을 처리하고 나면 10시가 훌쩍 넘었다. 난 퇴근하면 지칠 대로 지쳐 기계처럼 딱딱 움직일 수도 없다. 옷도 갈아입고 화장도 지우고 씻고 뒹굴거리다 쌓인 설거지 거리를 보면 아주 진이 다 빠져버리는 것이다.
그마저도 미리 준비해 둔 밥이 없거나 식재료가 떨어지면 해 먹을 게 없어서 당황해서 냉장고를 뒤지고 또 뒤져야 한다. 그래서 주말이 되면 장을 보러 다니기 바쁘다. 근처 마트는 비싸서 어떤 주말은 시장에 가서 채소를 사 오고 어떤 주말에는 이마트에 가서 노브랜드 제품을 예산에 맞게 최대한 쓸어 온다. 사 온걸 그냥 두는가? 냉장고에 분류해 정리하고 너무 많은 건 소분해 냉동실에 넣어야 한다. 밥은 미리 전날 잡곡밥을 불려두고 밥솥 꽉 차게 9인분의 밥을 하고 보관용기에 담아 일주일치 밥을 해서 냉동한다.
그렇게 내 입에 넣을 밥 준비로만 주말이 간다.
혼자 살면서 매 끼니 밥을 챙기며 스트레스를 받다 보니 자신의 손으로는 절대 밥상을 차리지 않는 아빠가 떠올랐다.
부모님은 세끼 모두 밥상을 차려 밥을 드신다. 아빠는 밥상에 항상 막 한 밥이 올라와야 하고 국이 꼭 올라가야 한다. 반찬도 너무 적으면 반찬이 적다고 뭐라고 하기 때문에 네다섯 가지 반찬을 꼭 접시에 덜어 올려야 한다.
밥상을 차려본 사람은 안다. 밥을 차리려면 적어도 1시간에서 40분 전에는 식사 준비를 해야 하고, 밥을 20~30분 정도 먹고, 또 요리한 시간만큼 치우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러면 밥상을 차리는 사람은 한 끼마다 2~3시간 정도 시간이 걸리는데 세끼를 다 챙기면 정말 밥 차리다 하루가 끝이 난다.
엄마는 신데렐라다. 나는 신데렐라 딸. 엄마의 하루는 새벽부터 저녁까지 쉴 새 없이 바쁘다. 내가 독립하기 전, 주말에 같이 나들이라도 갈 때면 오전 11시에 미리 아빠 드실 밥상을 차려두고 나와 오후 4시 전에는 또 저녁 밥상을 차리기 위해 반드시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 다시 아빠 밥을 차리기 위해 사이 시간에 다닐 수 있는 집 근처만 다닌다. 그러다 좀 늦어 4시가 넘으면 되면 아빠 밥을 차리기 위해 집으로 가는 발걸음이 너무 빨라서 나는 엄마를 따라가지 못할 정도다. 엄마는 아빠 밥을 차리기 위해 존재하는 사람인가?
"그놈의 밥, 밥, 밥. 아빠 밥 안 차려 주면 큰 일이라도 나?!"
엄마가 꼬박꼬박 차려주는 밥은 요즘 중년들에게도 유별난 일인지 친구분들을 만나거나 친척들을 만나면 뜨거운 화재거리가 되지만, 그렇다고 우리 집이 딱히 달라지는 건 아니다. 그냥 엄마는 그 자리에서 바보 소리를 듣고 아빠는 트로피라도 받은 듯 으쓱대고 끝나는 해피소드만 된다.
아빠는 밥상을 차리지 못해서 안치라는 게 아니구나. 누군가에게 밥상을 받는 것 자체가 권력이구나.
같이 살면서 안에서는 이상하지만 그냥 자연스러웠던 우리 집 풍경이 나와보니 다시 보인다. 이제 알겠다. 우리 집 밥상은 그냥 밥상이 아니라는 걸, 밥상 하나에도 권력관계가 반영된다는 걸 어렴풋 하지만 확실히 깨달았다.
인스타그램도 놀러오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