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린 독립 14
오랫동안 우리 집은 차가 없었다. 아빠는 눈이 나빠 차를 몰 수 없었고 엄마는 우리를 키우느라 바빴다. 그래서인지 이사를 간 집들만큼은 모두 도심에 역과 가까운 곳에 살았다. 그동안 초 역세권에 주변 인프라가 좋았던 동네에서만 살아온 30여 년의 나름 도시 여자인 나, 삼각커피.
하지만 도시 여자로 평생을 살아온 나도 도심에 살면서 느낀 고충이 존재했다.
오랫동안 살던 도심 동네는 상업과 주거지역 모두 다 뒤섞인 큰 번화가이다. 집 근처에 환승이 되는 지하철이 두 개나 있고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기도 편했다. 다양한 공공시설이 가까워서 무언가 기관에 제출하거나 택배를 보내거나 서류를 뽑기에도 전혀 불편함이 없었다. 거기다 체인점 가게, 대형 마트, 지하상가 등 주변에 없는 가게가 없어 새로 나온 신메뉴가 먹고 싶은 메뉴가 있으면 쉽게 사 먹고, 저렴하고 다양한 쇼핑도 편하게 했다.
장점이 너무나 많은 곳이지만 이런 입지의 지역을 사람들이 가만 둘리가 없다.
제일 큰 문제점은 인구밀도로 오는 답답함과 시끄러움이었다. 오래된 건물들은 십 년 전부터 하나둘 부서지고 새 건물들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건물이 하나 부서지고 머리를 울릴 듯한 공사 소리가 좀 잦아들어 이제 좀 살겠다, 싶으면 바로 다음 건물이 무너져 내렸다. 공사소리가 줄고 조용해지자 이제는 집 앞 작은 빌라들은 모두 없어지고 20층이 넘는 높은 오피스텔이 줄줄이 집 앞을 가로막기 시작했다. 하늘을 쳐다볼 수도 없는 작은 틈 없이 빽빽이 올라간 건물들을 보고 있자니 현대 발전된 기술과 멋진 건축물에 감탄하면서도 밤에 커튼을 안치고는 옷을 갈아입을 수 없는 상황이 펼쳐졌다.
집 앞으로는 계절마다 축제가 열리기도 하고 어쩔 때는 여러 단체에서는 시위가 벌어지기도 한다. 시끄러운 음악소리와 사람들 소리가 어쩔 땐 북적북적 활기찬 느낌이 들면서도, 대학 시험기간이나 집중해서 해야 할 일이 있을 때면 귀를 틀어막고 머리를 쥐어뜯기를 수시로 한다.
집 근처가 번화가니, 시간이 날 때면 나가 쇼핑이라도 하고 산책이라도 하려고 하면 언제 나가도 사람들로 북적인다. 지나가면 들리는 중국어, 몽골어, 영어, 한국어로 시끄럽다. 인파를 비집고 들어가 옷을 고르고, 세일 상품을 쟁취한 뒤 맛집에 줄을 서서 밥을 먹는다.
밤에는 술에 취해 소리를 지르는 사람과 개 짖는 소리, 싸우는 소리가 일상이고 집 앞 편의점 앞에서 인터넷 방송을 하는 사람들까지 더해져 밤이지만 낮처럼 뜨거운 사람 사는 열기로 가득하다.
그래서 주말에 집에서 쉬려고 하면 부모님이 다 계시니 답답함에 밖으로 나오면 사람들이 많아 밖에서도 부대끼는 느낌이 항상 들었다. 내향인인 나로서는 숨만 쉬어도 기가 빨리는 느낌이랄까?
그래서 독립할 집을 찾아 임장을 다니면서 본 여러 동네 중에 지금의 동네가 제일 마음이 갔는 지도 모르겠다. 동네 전체가 조용하고 가족 단위의 한적한 느낌이 가득했다. 주거지 위주의 건물들과 옹기종기 모인 상가들이 귀여웠다. 오래된 아파트단지지만 외관과 내부 모두 관리가 잘 되어 있고, 조경과 각종 나무들도 땅에 오래 터를 잡고 스스로 자라나 흐드러지게 큰 모습이 이 지역 터주대감 같은 든든한 모습이었다.
전체적으로 평온하고 차분한 느낌이 번화가 도심 속에서 심신이 지친 나에게는 좋은 이미지로 다가왔고, 제일 중요한 금액적인 부분에 있어서도 내 예산과 딱 맞아떨어졌다.
'그래! 이 시끄럽고 혼돈의 번화가에서 벗어나 이제 평온하고 한적한 곳에서 살아보는 거야!'
그렇게 1년 정도 대출준비와 이사과정을 거쳐 외곽 구축 아파트로 거주지를 옮기고 살게 된 지 언 10개월 차.
연재를 하면서도 시간이 지났는데 긴 시간은 아니지만 그 사이 외곽에 살아보면서 처음과 달리 살아보며 새롭게 느낀 점들이 있다.
처음 이사 올 당시만 해도 '구축'에 '복도식 아파트'에 이사를 간다는 부분에서 제일 걱정이 많았다. '혹시나 우리 동 같은 층에 시끄러운 사람이 살면 어떻게 하지? 막 소리 지르고 소란 피우면 복도라 다 들릴 텐데..' 하는 고민부터 '여자 혼자 사는 거 같은 층 사람들이 알면 위험한 거 아닌가? 집 앞에 cctv를 달아야 하나?'라는 사생활에 대한 고민까지 걱정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는데 막상 이사를 와보니
사람이 살고 있는 건가 싶을 정도로 조용하다. 출퇴근 때 복도에 나와도 사람을 마주쳐본 적이 거의 없다. 도심에 살 때 위층에서 하도 쿵쿵거려서 몇 번을 올라가서 따질까 했던 층간 소음도 거의 들리지 않는다. 사람이 살고 있긴 한 걸까? 싶어서 밖에 나가 창문을 올려다보면 층층이 집마다 불빛이 가득한데 동네만 평온하게 아니라 내가 사는 아파트도 내가 생각하고 상상한 것보다 더 조용해서 '조용'보다는 '정적'으로 표현하고 싶어질 정도다.
이곳도 장점이 있다. 외곽 아파트의 장점이라면, 바깥 풍경이 확 트여 좋다. 베란다 밖으로 보이는 쭉 뻗은 개천과 밭, 다양한 나무들이 눈을 편안하게 해 준다. 봄, 여름, 가을, 겨울 계절마다 달라지는 풍경을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앞에 막힌 건물이 없어서 옷을 벗고 돌아다녀도 신경 쓸 일이 없어 좋다.
그리고 어딜 가도 한가하다. 극장에도 사람이 없고 마트나 식당에 가도 북적이는 일이 없다. 세일 코너도 직원분이 아무리 목청껏 홍보를 해도 겨우 몇 명 모여 평온하게 물건을 골라 담는다.
이사 오기 전 상상만으로 떠올린 긍정적 느낌의 '한적함'은 살다 보니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다. 아파트에서 사람 보기가 힘들고 주변엔 마트나 식당이 없어 한참 단지를 걸어 빠져나와야 한다. 주변에 있을 건 다 있지만 단지에서 나오는 데 걸리는 시간이 있어 쉬는 날 근처 쇼핑이나 볼 일을 보러 나가야 하면 단단히 각오하고 나가고, 나갈 때 한꺼번에 일을 처리해야 한다.
그동안 복잡한 곳에 살아서 한적하고 평온하면 마음의 평화를 가져다 줄줄 알았다. 그런데 이게 웬걸? 혼자 살고, 거리가 먼 길을 오가면서 돌아다녀도 길에도 사람이 너무 없으니 이 외각 동네가 조금은 쓸쓸하고 마음 한편이 외롭다.
사람 마음이 변덕스러운 건 알았지만 내가 이럴 줄 몰랐다. 그렇게 사람에 기 빨리는 게 싫었는데, 그렇다고 이렇게 사람이 너무 없으니 재미가 없다.
마트에서 저녁 할인타임에 음식을 살 때 이 사람 저 사람 몰려들어 경쟁하는 맛이 있어야 재밌고 기분이 좋은데 아무도 건들지 않은 쌓은 음식을 집어 들어 집에 오면 이상하게 기분이 좋지 않고 맛도 없다. 영화관에서도 관이 꽉 차도록 사람이 바글바글해서 영화에 집중 못하고 떠들어서 시끄럽다고 싫어해도 웃긴 장면이 나올 때면 웃음이 터져 모르는 사람들끼리 다 같이 까르르 웃는 재미가 있었는데, 이 동네 영화관은 사람이 없어 나 포함 두 명이서 영화를 봤더니 그렇게 허전하고 어색할 수가 없다.
그렇게 이사한 지 10개월 차가 넘어가니 아이러니하게도 한가한 주말에는 지금 동네를 벗어나 빌딩 숲 도심 속으로 다시 스멀스멀 기어 들어가 복작복작한 인파를 즐기는 이상 증세를 보이고 있다.
적당히 넓은 곳, 높고 멋진 건물들이 위엄을 뽐내고 적당히 많은 인파 속에 파묻혀 있으면 기분이 좋아지고 왜인지 덜 외롭다. 내가 독립 후에 너무 혼자인 상태로 지내서 더 외로움이 커진 걸 수도 있겠다. 단지 행복해 보이는 군중 속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되는 순간들이 생겨났다.
그래서 딱히 할 게 없어도 미술관도 가고, 궁도 구경하고, 쇼핑몰도 가고, 큰 서점에 가서 책도 구경한다.
하지만 시간을 잘 못 맞춰 퇴근 시간에 지옥철을 타고 숨도 못 쉬고 사람 사이에 껴 겨우겨우 집으로 돌아갈 때면 '망했다..!! 내가 왜 이걸 까먹고 있었지?? 내가 이래서 지금 동네가 좋았던 거야..' 하면서 땅을 치고 후회하며 2시간이 넘게 걸러 집으로 돌아가며 다시 한번 내 성향에 대해 깊게 고찰하는 거다.
사람과 거리를 두고 나만의 공간에 혼자 있고 싶어 했던 내가 지금은 조금 쓸쓸하다. 창 밖에 개천과 흐드러지게 핀 꽃들이 예뻤는데 이제는 그 옆을 지나는 도로의 차들의 움직임에 더 눈이 간다. 쓰레기 버리러 나갔다 보이는 아파트 참의 알록달록 다른 색으로 켜진 불들이 마음을 안심시킨다. 당근에서 우리 동네 소식을 확인하고 동네 모임을 뒤적거린다.
처음 혼자 사는 데 외곽에 살아서 더 이런 느낌이 드는 걸 지도 모른다. 오롯이 혼자로 살고, 혼자 해야 하는 일이 많아지니, 이제야 혼자를 제대로 느껴본다. 항상 빠르고 간편하게 주변에 있던 편의시설들이 이제는 20분씩 걸려 찾아다녀야 하니 '빨리빨리'에서 하나씩 천천히 해야 하는 느긋함을 배우는 중인지도 모른다.
또한 살면서 내 주거취향도 알게 된 것 같다. 난 유흥시설은 적지만 더 도심 가까이 있는 곳이 좋고 더 주민들이 모여 살아 복작복작 한 곳이 좋다. 그리고 나는 너무 혼자인 것도 싫어하는 사람이었다. 사람이 싫다고 하지만 적당한 거리에서 사람과 어울리고 싶고 함께 살고 싶어 한다. 나와보니, 살아보니 처음 보는 내 모습과 성격이 보인다. 이제야 알아지는 내 새로운 모습들에 나도 놀라는 중이다. 이것이... 독립의 효과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