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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삼각커피 Oct 20. 2021

N잡 2년 차, 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


그동안 일러스트레이터로 일이 적은 게 '나만 좋아하는' 혹은 '활용 가치가 없는' 그림을 그려온 탓인가 싶어 '다른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유행을 따른' 그림 스타로 그림체 변화를 시도했다. 나에겐 내 정체성을 바꾸는 일만큼 큰일이라 고민이 많았지만 결심을 내려야 했다. 하지만 다른 사람 눈에 예뻐 보이는 그림을 그려야 한다는 강박, 한 장을 그려도 완성도 있는 그림을 그려야 한다는 부담에 마음처럼 쉽게 그림이 그려지지 않았다.


일러스트레이터로 채우지 못한 주머니를 카페에서 채우고, 그림으로 다 표현하지 못하는 마음을 글로 풀었던 건데 어째 점점 그림과 멀어지는 듯했다. 의무감에 꾸역꾸역 그린 그림은 아무리 노력해도 내 마음에 들지 않아 더 내 그림에 실망했거고, 조금씩 거리가 생겼다. 일러스트레이터로로서 존재감이 희미해져 가는 것 같아 가슴 한 구석이 늘 뻐근했다.


그러다 올해, 예전 그림 스타일로 작업해 달라는 의뢰가 들어왔다. 내가 너무 사랑한 나의 그림. 그릴 때마다 눈과 뇌 속이 슈팅스타의 캔디볼을 씹을 때 마냥 팡팡 터지는 희열을 주었던 그림들. 그 그림들을 보고 연락이 왔다. 그것뿐인가? 그림에 대한 협의, 계약, 전달, 입금까지 너무나 순조롭게 진행됐다. 내가 지금까지 일러스트레이터로 일 한건 일이 아니고 학대였나 싶을 정도로 스트레스 없이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계약서 작성은 차일피일 미룬 채 우선 작업만 닦달해 쫓기듯 일 한 경험, 결과물을 넘겼는데 반년 넘게 작업비를 입금 안 하고 연락도 모두 씹어 변호사와 상담했던 일들이 아직도 선명하다. 이렇게 정상적으로 일러스트레이터 일을 할 수 있었는데!


나에게 그림으로 먹고사는 건 고양이와 친하지기와 비슷하다. 너무 사랑하는 마음에 다가가 만지려고 적극적으로 달려들면 후다닥 도망가고, 관심 없는 듯 뒤돌아 누우면 슬그머니 다가가와 내 다리에 머리를 비비듯 스치고 지나가거나 아무렇지 않게 곁에 머물다 가는 그런 존재. 나는 그냥 아무 때나 와락 껴안아 구석구석 만지고 쓰다듬고, 앙증맞은 귀 속을 들여다보고, 입을 벌려 작은 앞니를 하나하나 확인하고 싶은데 가까워지기 위해 모든 걸 참고 적정거리를 유지하며 그대로 그 자리에 한결같이 있어야 마음을 여는 섬세한 고양이 같다.


내가 그림을 그리는 이 직업을 너무 많이 사랑해서, 무조건 대단한 걸 이뤄내 성공해야겠다는 욕심 때문에 나를 피곤하게 만들고 여유 없는 태도로 항상 절절 맸던 건 아닐까? 


지금 들어온 일로 '이제야 내 그림을 세상에서 알아주는 군!' 하며 절대 이번 일을 확대 해석하거나 들뜨지 않는다. 그냥 우연히 출간물의 분위기와 맞는 그림체라서 수많은 그림 중에서 운 좋게 우연히 발견된 것뿐이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그동안 해왔던 다른 일들 덕북에 내가 많이 달라졌다는 걸 느끼기도 했다. 카페를 하면서 낯선 사람과 어려움 없이 대화하고 소통할 수 있는 사회성이 늘었고, 여러 출판사와 미팅을 갖고 수시로 연락을 주고받다 보니 업무 관련 대처 능력이 전보다는 훨씬 능숙해졌다. 트라우마처럼 남은 외주 문의는 메일 한 통에도 잔뜩 깉장하게 만들었는데, 이제는 그때의 두려움과 공포가 많이 옅어져 메일도 고민 없이 열어본다. 그림 그릴 시간은 많이 줗었고 활동도 많이 못했지만 얻은 것들도 있었다.


'메타인지’라는 심리학 용어가 있다. 매타인지는 나를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자기 자신과 정서적으로 거리를 두는 것이다. 정신건강의학 양재웅 전문의에 의하면, 자기 자신과 정서적으로 거리를 두지 못해 장점과 단점을 객관화하지 못하면 스스로에 대한 평가가 늘 부정적이거나 타인에 평가에 따라 본인이 가치 있다고 믿거나 쓸모없다고 생각하기 쉽다고 한다.


그림뿐만 아니라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들과 나 자신에게도 여유가 없었다. 너무 가까이에서 바라보는 바람에 중요하게 살펴봐야 할 본질을 놓치고 있었던 것 같아 스스로를 되돌아봤다. 다른 사람의 속도에 신경 쓰지 말자고 스스로 다독였지만 어느 순간 자꾸만 조급해지고 속도를 올리곤 했다. 이 사실을 깨달은 지금, 어깨에 힘이 풀리고 아무 생각 없이 편하게 그리고 싶은 그림을 그릴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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