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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극적이고 능동적인 공허

공(空)과 케노시스(κένωσις) : 공허를 바라보는 서로 다른 관점

by 삼김

공허함을 느낄 때는 으레 기분이 어두워집니다.

재미있는 콘텐츠를 잔뜩 보고 핸드폰을 껐을 때. 여행을 다녀오고 텅 빈 집에 들어설 때. 하루 종일 친구, 가족, 동료들과 어울렸는데 문득 나 혼자만 있는 기분이 들 때.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해 쉬지 않고 노력했는데,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행복해지지 않을 때. 우리는 공허해집니다.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는 공허와 한 몸이 되었는지도 모릅니다. 과도한 도파민과 치열한 경쟁이 공허함을 만드는 걸 알면서도 어째서 우리는 멈추지 못할까요.


애초에 공허는 무엇일까요?

우리는 공허를 피할 수 있을까요? 아니면 공허하지 않도록 끊임없이 무언가를 채워 넣어야 할까요? 그것도 아니면 공허 그 자체를 받아들여야 할까요?


오늘의 에피파니는 ‘비어있다(空)’를 강조하는 불교의 공허와 기독교에서 말하는 ‘비우다(κένωσις)’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두 종교에서 말하는 공허를 비교하면서 지적인 에피파니를 느껴보고, 더 나아가서 오늘날의 공허를 다뤄보겠습니다.




사실 모든 것은 비어있다

우리는 공허하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공허합니다. 성과, 명예, 돈을 좇다가 건강, 행복을 잃어버리기도 하고, ‘그만 봐야지’ 하면서도 쇼츠처럼 짧은 쾌락을 좇다가 공허해집니다. 오늘날의 공허는 몸과 마음을 소진하고 난 후에 우리를 덮치죠. 일부러 공허함을 쫓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겁니다.


그러나 종교에서는 ‘비우다’는 개념을 강조하는 일이 많습니다. 불교의 경전 중 하나인 <반야심경>에는 잘 알려진 ‘색즉시공(色卽是空)’이라는 말이 있지요. 원본을 가져오면 아래와 같습니다.


舍利子 色不異空 空不異色 色卽是空 空卽是色 受想行識 亦復如是
사리자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 수상행식 역부여시
- 사리자여, 색은 공과 다르지 않고 공은 색과 다르지 않다. 색은 즉 공이고 공은 즉 색이다. 감각, 생각, 의식, 판단 또한 그러하다.
(참고 : 반야심경 - 미야사카 유코우 감수, 알에이치코리아 펴냄)


궁금하신 분이 있을 테니 의미를 살짝 살펴보겠습니다. 해석이 굳이 궁금하지 않으신 분들은 이 단락을 넘어가도 좋습니다.

‘사리자’는 부처의 제자 중 한 명의 이름이라고 하니 넘어가겠습니다. 그 뒤로 이어지는 色不異空 空不異色(색불이공 공불이색)에서 말하는 ‘색’이란 물질을 뜻합니다. 이어지는 色卽是空 空卽是色(색즉시공 공즉시색)의 구절을 보면, 형체가 있는 모든 물질은 ‘비어있음’이고, ‘비어있음’ 또한 물질이라는 말이 됩니다. 우리가 느끼는 감각, 생각, 의식, 판단 즉 受想行識(수상행식)도 色(색) 물질과 다르지 않다는 이야기입니다.


여기서 반야심경을 더 심층적으로 해석하지는 않겠습니다. 저는 불교 전문가가 아니니 잘못된 해석을 할 수 있으니까요. 여기서는 불교에서 ‘비어있음’을 강조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 봅시다. 반야심경에 따르면 모든 것은 비어있습니다. 따라서 물질도 심지어 자신의 감각, 생각, 의식, 판단에도 집착할 필요가 없습니다. 집착, 그리고 자아조차 내려놓고 완전한 비움에 다다르는 상태, 해탈에 이르는 것이 불교의 궁극적인 목적이지요.


이 ‘비어있음(空)’은 우리가 느끼는 공허함과는 다릅니다. 오늘날 우리가 느끼는 공허함은 아무 노력 없이 갑자기 찾아오지만, 불교에서 말하는 공허함은 끝없는 수양을 통해 얻을 수 있습니다. 그에 반해 우리의 노력은 도파민으로 얻을 수 있는 짧은 쾌락과 경제적으로 안정된 미래만을 추구합니다. 결과적으로 얻는 건 공허함이지만, 이는 불교에서 말하는 해탈과는 전혀 다른 어두운 감정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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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를 위해 나를 비우겠다

케노시스(κένωσις)라는 단어를 아시나요? 영어로는 Kenosis라고 씁니다. 네이버 영어 사전을 찾아보면 신학 용어로 ‘(예수가 인간의 모습을 취함에 따른) 신성 포기, (예수의) 비하(卑下)’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κένωσις라는 고대 그리스어는 비워낸다는 뜻입니다. 주로 예수의 ‘자기 비움’을 뜻하는 모양입니다.


불교와는 아무 상관없는 예수에게서 ‘비우다’는 개념이 튀어나오다니, 어리둥절하지 않나요?

물론 불교에서 말하는 ‘비우다’와는 차이가 좀 있습니다. 기독교 신학에서 나온 개념인데, 생소할 수 있으니 조금 설명해 보겠습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예수는 신의 아들입니다. 그는 스스로 하나님의 형태를 내려놓고 ‘자신을 비워’ 인간의 모습으로 이 세상에 내려왔습니다(제가 지금 성경을 가지고 있지 않아서 정확한 출처를 표기할 수는 없지만, 신약 빌립보서의 유명한 구절이니 관심 있으시면 찾아보아도 좋을 듯합니다). 즉, 예수는 인간을 위해 자신을 비워낸 것이지요.


Christ_in_Gethsemane.jpg <Christ in Gethsemane> Heinrich Hofmann

출처 : 위키커먼즈



불교에서 말하는 ‘비어있음(空)’은 자기 자신의 깨달음을 위한 겁니다. 하지만 예수의 비움, 케노시스는 남을 위해 자신을 비우는 것을 말합니다. 달리 말하면 타인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놓는 것입니다. 이는 기독교에서 말하는 아가페적 사랑, 완전한 헌신과도 이어져 있습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예시를 들면, 자식에 대한 부모의 사랑도 일종의 케노시스라고 볼 수 있을 겁니다.


‘비우다’는 행위가 이렇게 다르게 해석될 수 있다는 것이 놀랍지 않나요?

어쩌면 비우는 것은 인간이 신에 이르기 위해, 또는 신이 인간이 되기 위해 거쳐야만 하는 행위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두 종교가 비우다는 개념을 동시에 갖고 있다는 것, 그리고 다른 해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무척 흥미롭습니다.




오늘, 나의 공허함

우리가 느끼는 공허함은 수동적으로 생겨납니다. 살아가면서 자아를 하나하나 잃어가는 수동적 공허함이죠. 불교나 기독교에서 말하는 공허와는 다릅니다. 이들 종교에서 말하는 공허는 내가 적극적으로 나 자신을 비우는 것이니까요. 열반에 이르려는 수도승들은 자신의 의지로 능동적으로 공허를 추구합니다. 물론 쉽지는 않을 겁니다. 속세의 인간은 아주 많은 집착을 가지고 있으니까요. 그것을 하나하나 내려놓는 것은 고통스럽고 괴로울 겁니다. 어쩌면 우리가 문득 세상으로부터 격리된 듯한 공허를 느낄 때처럼 아플 지도 모르지요.


오늘날의 공허함은 필연적 인지도 모릅니다. 고도로 발달한 자본주의, 성과주의, 경쟁 구도 속에서 살아남으려 애쓰는 우리에게는 자아를 찾을 기회가 주어지지 않습니다. 아주 빠르게 쏟아지는 정보들은 초조함과 불안을 더 합니다. 그것들을 닥치는 대로 처리하면서 살아가다 보면 필연적으로 공허가 찾아옵니다. 이러려고 사는 것이 아닌데. 이번 생에서 행복을 찾을 수는 있을까. 우리는 자아를 현대 사회에 빼앗긴 채 공허를 느낍니다. 자아를 내려놓지는 못했는데, 자아가 없어진 상태를 겪는 것입니다.


이런 공허로는 열반에 이르지도, 사랑을 실천하지도 못합니다. 불교나 기독교가 생겨났을 때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겁니다. 오늘날 우리의 자아는 소멸합니다. 마치 서버에 저장된 0과 1로 이루어진 데이터처럼, 인간의 자아는 그 자체의 풍부함을 잃어버린 채 납작해져서 사회를 굴리는 작은 부품이 됩니다. 우리의 욕망도 감정도 그저 상품을 더 팔기 위한 원동력으로 기능할 뿐이지요.


무엇을 원하든 자아를 잃어버린 인간은 공허합니다. 원치 않은 공허를 떠안은 인간은 어찌할 줄 몰라 방황합니다. 공허한 인간은 짧은 쾌락에 기대거나 없는 자아를 있는 것처럼 부풀려서 스스로를 전시합니다. 공허 그 자체를 받아들일 준비도 되어 있지 않고, 무엇보다도 원해서 얻은 공허가 아니니까요.


우리에게 필요한 건, 불교나 기독교에서 말하는 자기 비움이 아닙니다. 잃어버린 자아를 찾아 채워 넣는 것입니다. 내가 통제할 수 있는 자아를 찾아야 비로소 인간으로 태어난 의미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러려면 역설적으로 수도승처럼 의식적으로 현대 사회에서 빠져나올 필요가 있습니다. 회사가 평가하는 성과 또는 성적표, 돈, 부동산이 아니라 그저 행복할 권리를 지닌 하나의 인간으로서 사는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내가 정말로 원하는 게 이것인가?’, ‘저 사람도 행복할 권리가 있는 인간이지 않나?’ 같은 의문이 필요합니다. 한정된 시간에 성과를 내야 한다, 효율을 추구해야 한다 같은 관점에서는 절대 나올 수 없는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나 자신과 인간에 대한 질문을 하는 시간, 멈춰 선 그 시간에서야 조금씩 자아를 찾을 수 있습니다. 수동적으로 빼앗기던 자아를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찾아와야 합니다. 스스로의 의지로 자아를 찾아오고, 자아로 충만한 사람이 되어서야 비로소 진정한 비움을 실천할 수 있게 됩니다. 나 자신의 물질적인 이득이 아니라 다른 이를 위한 비움을 할 수 있게 됩니다. 그래야만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세상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게 될 겁니다. 저는 이것이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공허를 채우고, 다시 공허를 끌어안는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음 주 예고


나는 지금 우물 바닥에 시체로 누워있다. 마지막 숨을 쉰 지도 오래되었고 심장은 벌써 멈춰 버렸다.
- <내 이름은 빨강>, 오르한 파묵, 민음사


위의 문장은 <내 이름은 빨강>의 첫 문장입니다.

흥미진진하지 않나요? 시체가 말을 하는 듯한 기이한 느낌이 작품에 대한 기대감을 한껏 높여줍니다.


다음 주에 할 이야기는 이런 흥미진진한 이야기들, “픽션”에 대해 다뤄보려고 합니다.

픽션이 그려내는 이야기들, 그것들이 주는 풍부한 상상의 세계와 온몸이 짜릿해지는 경험들에 대해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그러면 다음 주 에피파니도 모쪼록 기대해 주시길 바라며 오늘의 글을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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