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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삼끼 Oct 28. 2023

Prolog. 백수 되고 책(씩)이나 읽고 삽니다.

백수의 독서노트

 


 “그래, 김 주임은 나가면 어디로 가려고?”


 회사를 그만두겠다고 하자, 상사와 동료들은 물었다. 딱히 계획이 없다고 대답했는데, 그들은 믿지 않았다. 한 직장 선배는 “요즘 새로 채용 공고 난 곳 어딘지 찾아보자.”라며 우스갯소리를 던졌다. (물론, 우스갯소리가 장난이라는 뜻은 아니다. 그는 진짜로 검색했고, 우스갯소리도 진담일 수 있는 거였다.)


 “퇴사하면 이제 뭐 할 거야?”

 친구들과 가족들도 물었다. 다시 그냥 책이나 읽으며 집에서 지내겠다고 했고, 역시 아무도 믿지 않았다. 마주한 눈빛에서 분명 뭔가 계획이 있을거라는 믿음이 보였다. 적어도 해외 여행이라도 갈 것이라고 철썩같이 믿는 듯했다.


 억울했다. 아니, 나는 정말로 계획이 없다니까요!


    



 이런 억울한 오해는 백수가 된 지 몇 개월이 지나도 똑같았다. ‘그냥 지낸다’는 답을 할 때마다 불신의 눈초리를 받았다. 마치 내가 저에게 뭔가 숨기고 있다는 걸 다 안다는 눈빛.

     

 “정말이야. 그냥 진짜 책 읽고 필사하고 그러면 하루 금방 가.”

 “필사? 그것 봐! 너 글 쓰는구나! 작가 되려고 하는 거지?”

 “......?”     

 “1년 전에 산 아이패드 드디어 한 번 꺼내봤잖아. 낙서해 보는데 재밌더라.”

 “그림? 그걸로 뭐 하려고? 이모티콘? 요즘 인스타툰으로 잘 되는 사람도 많다더라!”

 “......?”

     

 아주 조그마한 것에서도 그들은 내 미래의 희망을 찾았다. 아무리 아니라고 손사레를 쳐도 소용이 없었다. 아니, 정말로 나는 책이나 읽는 백수라니까요. 대체 나를 왜 그렇게 성실하고 계획적인 인간으로 보는 건데! 억울함에 나 홀로 가슴을 퍽퍽 쳤다. 저는요 계획이 없어요. 어제 읽다 만 책 결말이 궁금하긴 하네. 

    

 하긴, 이유야 어렴풋이 알고는 있다.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는 것’은 절대 ‘아무것도 아닌, 그냥 그런 일’로 받아들여지지 못한다. 최소한 무척 아프거나, 거창한 계획이 있거나, 부푼 꿈이 있어야 인정된다. 그래서 퇴사 후 계획 없이 집과 카페를 오가며 책이나 읽고 지낸다는, 아무 생각 없이 직장을 그만둔다는 건 선택지로 쉽게 받아들여지지 못한다.

 더욱이, 흙수저에 가까운 갓 서른 초반의 사회 초년생이 그런 사치를 평온히 누릴 거라고 믿을 수 없던 것도 한몫하지 않았을까. 내가 아무리 행복하다고 말해도 그들은 내 미래를 찾는 것 만큼이나 불안을 찾으려 들었다. ‘말은 그렇게 하지만, 분명 불안하지?’ 남들은 매일 앞으로 나아가는데, 책이나 읽으며 아무 계획 없이 지내는 건 불가능한 일이라고. 이 대한민국에서, 감히 청년 백수가, 책씩이나 읽으며 지내는 건 쉽게 통용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주변의 시선이 이쯤 되니, ‘더 이상 타인의 시선으로 내 길을 정하지 말자.’라는 퇴사 초기의 다짐도 흔들렸다. ‘손 안 벌리고 스스로 책임지고 살고 있는데, 내가 잘 못 살고 있는 걸까. 뭔가 하긴 해야 하나...’ 분명 나 혼자는 편안했는데, 다른 사람과 만나고 나면, 그래서 ‘미래’라는 개념을 다시 인식하고 나면 불안해져 버렸다. 


   





 그렇게 불안과 평온을 저울질하던 어느 날, 지역 서점에 책을 사러 갔다. 매대에 책 한 권을 올리며 말했다.


 “책쿵 포인트 사용해 주세요. 저 몇 포인트 있나요?”     

  (‘책쿵’은 지자체의 독서 장려 사업으로, 도서관에서 책을 빌리면 권당 50포인트씩 적립해 주고, 지역 서점에서 책을 구매할 때 사용할 수 있다.)


 “4,150포인트 있어요. 다 사용하시겠어요?” 

         

 4천?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한 권에 50원이니 10월 초인 지금까지 올해 83권의 책을 읽었다는 말이 된다. 물론 누군가에게는 “고작?”이라고 할 수 있겠으나, 1년에 읽는 책이 다섯 손가락 안에 들던 내게는 엄청난 수직상승이었다.


 ‘와… 나 진짜 제대로 책이나 읽으며 지냈구나!’


 정확한 물증을 확인한 순간, 불안함이 아닌 뿌듯함과 자신감이 올라왔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게 아니다. 나는 무려 ‘1년 동안 책을 83권이나 읽은 백수’가 되어 있었다.





 집에 돌아와 올해 적었던 필사 노트를 꺼내보았다. 총 5권이었다. 5권의 노트에는 마음에 와닿는 글귀들이 한가득 적혀있었다. 이따금 파란색 펜으로 내 생각을 적어둔 글씨도 보였다. 한두 줄 적어두기도 했고, 한두 페이지를 적기도 했다. 건조하기도 했고, 구구절절하기도 했다. 옛 일기를 들추어 보는 것처럼 손발이 꼬이고 차마 볼 수 없는 민망함도 쓰여 있었다. 그럼에도, 왠지 안도감이 찾아왔다.

    

 이것이 당장 내 삶을 바꾸어 준다거나, 앞으로 일을 할 때 ‘효율성’ 있는 ‘스펙’이 되어주지도 못할 것이다. 여전히 누군가의 눈에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책‘이나’ 읽으며 반년을 지낸 정신 차리지 못한 백수로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나 스스로 ‘그래서 백수 되고 뭐 하고 지냈는데?’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되어주었다.     

 고민하고 울고 불고 짜다가 직장을 그만두고서야 깨달은 건, ‘그만둔다’는 게 생각보다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이었다. 마찬가지다. 퇴사가 별 일 아니듯, 퇴사 후 지내는 삶에도 거창한 수식을 붙일 필요는 없다. 그러니 감히 백수가 되어, 책 ‘씩이나’ 읽는 한량으로 지내는 것도 생각보다 아무것도 아닌, 그냥 나의 삶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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