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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삼끼 Nov 12. 2023

요양병원의 개똥철학

똥과 존재의 무게감



 말에는 내뱉는 소리 크기, 억양, 의미에 따라 리드미컬한 강약이 존재한다. 그중 어떤 말은 이야기의 전후 사정 따위를 모두 잊게 할 정도로 강렬한 펀치를 날린다. 요양병원의 어느 할아버지가 간병인에게 내뱉은 이 한 문장처럼.

     

 “이, 내 똥이나 치우는 것들이!”

     

 말을 전해 들은 나는 충격에 잠시 멍해졌다가, 마치 내가 모욕이라도 들은 것처럼 화가 났다. 간병인이 그 할아버지에게 무슨 잘못을 했는지, 혹은 하지 않았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말을 내뱉을 때는 어느 정도의 강도를 넘어가는 건 꺼내지 말아야 한다. 특히나 권력관계가 존재할 때는 더욱 그렇다. 

 할아버지는 요양병원의 고객이었고, 간병인은 똑같은 말을 그에게 돌려줄 수 없다. “뭐라고? 이 똥이나 싸는 것이!”라고 했다가는 당장에 직장을 잃게 될 것이다. 그렇기에 이야기를 전해 들은 나는 괜히 엄마에게 분통을 터트렸다. 사람이 해선 안 되는 말에 대해, 갑질에 대해, 권력관계에 대해.


     



 그러나 나는 몰라도 한참 몰랐다. 인간의 권력관계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으며, 꼭 겉으로 날리는 펀치만 강렬한 충격을 주는 게 아니라 작은 바늘 같은 말로도 충분한 고통을 줄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 다른 날 간병인이 거동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할머니에게 한 말을 전해 듣고서야 깨달았다.

 간병사는 6인 병동실, 다른 환자들과 보호자들이 모두 있는 곳에서 할머니에게 핀잔하듯 짜증 섞인 말을 내뱉었다.

     

 “어휴, 또 똥 쌌네. 하루 종일 똥만 싸요?”     


 할머니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얼굴이 벌게져 고개를 숙였다고 한다. 이 말을 들은 나도 숙연히 고개를 숙였다. 전자의 할아버지 말이 분노를 일으키는 모욕감을 주었다면, 간병인이 내뱉은 말은 수치심을 주는 슬픔이었다. 간병인은 말로써 모두가 보고 듣는 요양병원의 광장 한가운데에 할머니는 똥만 싸는 존재로 끌고 왔다. 그곳이 광장이 아니라 1인실이었다면, 간병인은 그런 수치심을 주는 말을 내뱉지 않았을 것이며, 설령 했다고 해도 할머니가 수치심에 그토록 고개 숙일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할머니는 공동 병실을 써야 했으며, 손과 발을 뜻대로 움직일 신체적 자유가 없었다.


          





 똥. 그놈의 똥. 똥이 문제다. 왜 똥일까.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의 어느 구절을 떠올렸다.


 ‘똥 때문에 심판받는다면 인간 존재는 그 의미를 잃고 참을 수 없는 가벼움, 그 자체가 될 것이다. 스탈린의 아들이 고압 전류가 흐르는 철조망에 몸을 던진 것은 의미가 사라진 세계의 무한한 가벼움 때문에 한심하게 치솟은 접시 위에 자기 몸을 올려놓기 위해서다.’

     

 똥은 배설이라는 원초적인 행위의 결과이다. 마침 냄새도 나고 제법 혐오스러울 정도로 더럽기도 하다. 동시에 모든 생명체의 공통적인 행위이기도 하다. 그런 면에서 똥이란 자신의 존재에 의미와 개별성을 부여하는 인간을 ‘사실 너는 그저 다른 동물과 다를 바 없어.’라고 상기시키는 게 아닐까. 그러니까 ‘너는 똥이나 치우는 존재다.’ ‘너는 똥만 싸는 존재다’라고 상대를 규정하는 것은, 저울의 한쪽에 똥을 올려놓고 다른 한쪽에는 상대를 올려두어 저울이 수평을 이룬다는 걸 온몸으로 체감시키는 것이다. 자신의 존재에 똥보다 더 무거운 무언가가 없다는 것은 사람을 분노하게 하고, 수치심을 느끼게 한다.


          




 똥. 계속 똥 똥 거리니, 어쩐지 코끝에서 냄새가 나는 것 같기는 하지만 참고 조금 더 생각해 보았다. 단순히 누가 나에게 “이 똥 같은 것!”이라고 한다거나 “너는 똥만 싸는 존재야!”라고 한다고 해서 큰 타격을 받지는 않을 것 같다. 그냥 똥 이야기만 나오면 까르르 웃는 어린아이를 보는 마음으로 웃지 않을까. 스스로 아니라는 걸 충분히 납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위의 두 말은 왜 그토록 모욕감과 수치심을 주는 걸까?

      

 권력에 대한 관념으로 돌아오게 된다. 간병인은 실제로 돈을 받고 할아버지의 똥을 치우는 존재다. “내 똥이나 치우는 것이!”라는 말에 무례함을 근거로 비난할 수는 있지만 나는 당신의 똥을 치우지 않는다고 말할 수 없다. 할머니는 자신의 똥을 스스로 치우지 못하고 간병인의 손에 맡겨야 한다. “하루 종일 똥만 싸요?”라는 구박에 종일 누워 있어야 하는 할머니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그들은 권력을 가진 존재에 의해 타의적으로 저울 위에 올려진다. 권력을 가진 자는 말을 내뱉음으로써 저울이 사람 쪽으로 기울지 못하도록 억지로 수평을 맞추어 버린다. 애초에 저울은 움직일 수 없게 설계되어 있다. 어쩌면 똥 그 자체보다 그 일련의 과정이 모욕감과 수치심을 주는 것일지도 모른다. 자신의 존재의 의미가 타자화 되어 평가받는 것.     





 비겁한 권력의 말을 내뱉는 사람들도 똑같이 똥을 싼다. 하지만 그들 스스로는 자신의 존재는 똥보다 무겁다고 여길 것이다. 그들이 가진 권력이 무게감을 더할 것이라고.

 그러나 그것이야말로 개똥 같은 철학이다. 그러한 권력은 무게를 더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한없이 가볍게 떠오르는 헬륨 풍선과 같다. 그 말을 전해 들었을 때, 나는 (이 글을 읽는 독자도 마찬가지일 거라 믿는다) 그들을 무겁기는커녕 너무나 가벼운 존재로 여기게 되었으므로. 자신이 똥보다 무겁다는 것을 증명하는 존재의 의미는 적어도 타인에게 펀치를 날린다거나 바늘로 찌른다고 해서 생기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다시금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의 한 구절을 인용한다. 자신이 똥보다 무거운 존재라는 걸 입증하려고 고압 전류가 흐르는 철조망에 몸을 던진 스탈린의 아들에 대하여. 

    

 ‘천칭의 한쪽 접시에는 똥이 있었고 스탈린의 아들은 몸뚱이 전부를 다른 접시 위에 올려놓았지만, 천칭은 끄떡도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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