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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삼끼 Dec 09. 2023

SNS와 단문-현대판 아포리즘

아포리즘에 대하여 1


 솔직함이야말로 글쓰기의 내적인 정확함 아닐까? 솔직함은 군더더기가 없기에 정확함과 닿아 있다. 

 <자기 계발의 말들>/재수





    

 요즘 SNS에 한 문장 혹은, 200~300자 사이의 짧은 글로 핵심을 명료하고 유머러스하게 표현하는 글이 잘 퍼진다. 일명 ‘짤’이라 해서 재미있는 사진과 함께 퍼지기도 하는 이 짧은 글귀들을 보자면, 어떻게 이렇게 사람 속을 뻥 뚫리는 한 문장을 표현하는지 놀랍다. 근엄한 장군이 ‘인간은 언제나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라고 하는 짤이라거나, ‘책은 읽을 책을 사는 게 아니라, 산 책 중에 읽는 거예요.’라는 문장이 자주 인용되는 것은 그만큼 많은 이들의 마음을 정확하게 관통하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이에 대한 우려와 걱정스러운 시선도 적지 않다. 앞뒤 맥락 없이 퍼지는 글은 때로 처음의 진실에서 멀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전체 상황이나 맥락을 보지 않고, 그저 짧고 통쾌한 문장으로 서로를 공격하는 일도 잦다. 점점 사람들이 긴 서사가 있는 글을 읽지 못하게 되는 현상도 이와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종종 이런 짧고 재미있는 글귀를 사랑한다. SNS의 일명 사이다 발언이나, 공감 짤, 감성 글귀 등에 대한 상반된 입장을 볼 때면, 이게 바로 현대판 ‘아포리즘’ 같다는 생각이 든다. 아포리즘. 깊은 진리를 간결하고 압축된 형식으로 나타내는 짧은 글로, 격언, 잠언 등이 있다. 가령, 히포크라테스의 ‘예술은 길고 인생은 짧다.’라든가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따위가 있겠다. 우리가 수험생 시절에 책상 앞에 붙여 둔 수많은 공부 자극 명언들도 아포리즘의 한 형태일 것이다.

 이렇듯 아포리즘은 아주 오랜 옛날부터 함께했고 그에 대한 비판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아포리즘은 사라지기는커녕, 종이매체가 힘을 잃는 와중에도 현대화에 성공하여 더욱 재미있게 퍼져나가고 있다.





     



 살아남았기 때문에 사랑하는 건 아니다. 글에서까지 약육강식의 법칙을 적용하고 싶지는 않다. (그리고 난 긴 문장도 무척 사랑한다.) 두 가지 이유가 있는데, 우선 단순함에서 나오는 즐거움과 해방감, 그러니까 ‘낄낄거림’의 위안을 받기 때문이다.


 ‘책은 읽을 것을 사는 게 아니라, 산 것 중에 읽는 것이다.’

 몇 년 전까지 나는 책에 대한 수집욕이 강했다. 늘 다 읽지도 못하면서 새 책을 샀고, 들이는 속도가 읽는 속도를 제치는 건 아주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다 보니 언젠가부터 책을 구매하면서도 자책감이 들었다. 좋아하는 걸 소비하면서도 고통스러웠고, 읽지 않은 채 책장에 꽂혀가는 책들을 보면 숨이 막히기도 했다. 그런데 이 문장을 보는 순간, 그 자괴감이 말끔히 씻어 내려갔다. 아마 나처럼 책을 사며 괴로워하던 많은 이들이 ‘책은 읽을 걸 사는 게 아니야! 산 것 중에 읽는 거지!’라며 낄낄 웃으며 책을 살 수 있게 되었을 것이다. 사실 사면서 그게 무조건 맞는 말이라고 진심으로 생각하지는 않았다. 반은 재미, 반은 핑계였을 뿐이다. 그러나 해서는 안 될 이유가 너무 많은 세상에서, 단순함은 자유로운 쾌감과 낄낄거림을 선물해 준다. (물론 다음 장에서 말하겠지만, 이 아포리즘은 내게 조금 변형되었다.)


     

 다음으로 아포리즘을 사랑하는 이유는, 확장성에서 얻는 즐거움이다. 짧은 글은 모든 상황과 배경, 각자의 처지, 경우의 수를 담을 수 없다. 요약되고 압축된다. 요약과 압축은 ‘배제’의 다른 표현이다. 핵심이 아닌 것은 배제된다. 이런 특성은 아포리즘이 비판받는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다. 배제된 주변의 어떤 것이, 사실 본질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을 배제한 핵심은 말장난에 불과해질 수도 있는 위험성을 내포한다.

 그러나, 나는 요약과 압축이 배제의 다른 표현이기도 하면서, 아이러니하게도 그렇기에 모든 것을 포함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구체적인 상황을 제한하지 않고 맥락을 배제하였기에, 오히려 우리는 수많은 맥락과 상황으로 확장할 수 있다.


 가령, 장문의 글은 ‘A의 경우를 제외하고, B의 경우만 두고 살펴본다면~’이라는 식으로 B의 경우에 초점을 맞추어 파고든다. B의 경우에 대해 깊게 사유할 수 있으나 애초에 A를 배제한 것이기에 A에 대해 사유할 가능성 자체가 배제된다.

 반면, 구체적 상황 자체를 아예 언급하지 않은 아포리즘을 보며 우리는 ‘그럼 A에서는?’ ‘B는? C는? D, E에서도?’라며 끝없이 그 말을 가지고 놀며 사유할 수 있다. 그 결과 어떤 글귀는 더욱 강화되기도 하며, 오히려 비판받기도 한다. 아예 다른 분야로 확장되어 짧은 글귀에서 영감을 받아 긴 장문의 글이 탄생하기도 한다.






 물론 긴 서사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자극적인 한 문장만으로 모든 걸 설명하거나, 다른 의견을 조롱하기 위해 아포리즘이 사용되는 데에 우려가 드는 건 당연하다. 그러나 우려점이 있다고 하여 그 자체가 잘못된 것이라고 볼 수는 없다.

 구구절절 상황을 설명할 힘조차 없는 하루, 짧은 통쾌함이나 선명한 공감에 위로받는 사람이 있다. 핵심적 문장은 언어의 효율성 측면에서도 상당한 기능을 하며, 효율적으로 전달된 하나의 구문은 수십, 수백의 다른 경우에 활용되며, 긴 호흡의 사유를 낳기도 한다.

 사실 이 글도 마찬가지다. 나 역시 책을 읽다가 한 문장에서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져 하나의 글을 완성한다. 책 전체의 맥락은 배제한 채, 한 문장에 꽂혀 쓰는 ‘백수가 되어 책씩이나 읽고 삽니다.’와 같이 말이다. (사실 이 글 첫머리에 인용한 재수 작가의 문장도 SNS나 아포리즘 따위와 전혀 관련이 없는 글에 사용된 문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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