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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삼끼 Dec 23. 2023

소설과 수필 사이

허풍쟁이의 글쓰기


 글 속의 ‘나’는 현실의 나보다 더 섬세하고 더 진지하고 치열하다. 처음엔 그것이 가식적으로 느껴져 괴롭고 부끄러웠지만 이제는 그것이 이 힘든 글쓰기를 계속해야 하는 이유임을 알게 되었다.

<그냥, 사람>, 홍은전





 처음 글쓰기를 시작했을 때, 에세이만큼 만만한 글쓰기는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야기의 서사는 이미 내 경험에서 나온 것이기에, 작가가 할 일은 허공의 이야기에 단어를 입혀 그것을 실체화하고, 거기에 자신의 느낌이나 생각 따위를 입히면 되는 거라고 말이다. 물론 그 실체화의 과정에서 내 어휘력의 한계에 머리를 쥐어뜯고, 뭉개진 문장에 자괴감을 맛봐야 하지만, 적어도 인물·사건·배경 같은 것을 새롭게 창작해야 하는 고통은 없을 테니까.

 그러나 보통 무언가를 만만히 보고 덤벼들면 알게 되는 법이다. 이 구역 제일의 만만이는 나라는 걸.


     

 막상 글을 쓰다 보니 알게 되었다. 에세이라는 장르는 소설과 수필의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묘기를 부리는 줄타기 같은 글이었다. 특히 인물을 그릴 때, 허구의 창작과 실존적 적시의 균형잡기에서 나는 번번이 떨어졌다.


 글에 나오는 화자가 정말 나와 완벽히 같은 인물인지 묻는다면, 그렇다고 대답할 자신이 없다. 홍은전 저자의 말처럼 글 속의 ‘나’는 글 밖의 ‘나’보다 더 섬세하고 더 진지하고 치열하기 때문이다. 정확히는, 글 속 시점의 내가 아닌, 되고 싶은 모습에 훨씬 가까웠다.

 그렇다고 그것이 완전히 내가 아닌 허구의 인물인가 묻는다면, 역시 아니다. 쓴 글을 보면, 평소에 그런 생각을 하고 사는 사람처럼 나를 서술했지만, 그 사유의 대부분은 글을 쓰면서 끄집어내는 것들이다. 쓰는 과정에서는 외부의 것들과 최대한 멀어진 채, 내가 되고 싶은 인간상이나 살고 싶은 삶의 방식을 진지하고 치열하게 고민한 결과물이다.


 그러니까 그런 생각을 한 것은 맞다. 하지만 생각과 실재가 동일하지 않다. 그 결과, 내가 되고자 하는 인물이 마치 지금의 나인 것처럼 그려지는 오류가 생기고 만다.          

 그래서 한동안 허풍쟁이가 된 듯한 기분에 글을 쓸 때마다 부끄러움이 몰려왔다. 특히나, 에세이의 생명력은 솔직함에서 나오는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에 더욱 혼란스러웠다. 글 안의 나는 실제의 나보다 너무나 정순하거나, 때로는 지나치게 가련하거나, 자주 미화되었기에 내 글에 대해 의심이 들었다. 특히 자기 미화는 최악이다. 가식의 끝판왕이랄까.


 그럼에도 나는 다시 내 삶과 생각을 풀어 놓는 글쓰기를 계속한다. 왜 나는 귀찮음과 자괴감에 머리를 쥐어뜯으면서도 결국 다시 키보드를 두드리게 되는 걸까. 좋은 글귀를 필사하는 도중 떠오르는 생각을 자꾸 밑에 적어두는 걸까.






 생각해 보면, 내가 글을 쓰는 이유는 완성된 글을 보며 뿌듯해하기보다 쓰는 시간 자체에 있었다. 단어를 선택하고, 글을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위에서 아래로 늘이는 시간 동안, 평소에는 하지 못했던 생각이 떠오르고 정리된다. 그 순간, 물리적 시간은 멈추고 내 안은 흐른다. 글뿐만 아니라 나 자신이 정돈되는 감각이다. 그 감각에 중독되어 놓지를 못하는 것이다.

     

 우리는 사진을 찍을 때면 매무시를 단정히 한다. 앞머리를 정돈하고 입꼬리를 올리고, 때로는 보정도 하면서. 그것을 프로필이나 각종 SNS에 올린다. 사진뿐인가. 회사에서의 ‘나’와 가족들 앞에서의 ‘나’는 거의 대척점에 있을 정도로 다른 존재다. 집에서 하듯 회사에 있으면 바로 사직 권고를 받을 테고 (아니 애초에 입사 자체가 어려울 거다), 회사에서 하듯 집에서 하면 진심으로 나를 걱정하는 가족들의 얼굴을 마주해야 할 게 분명하다.

 그와 비교한다면, 글을 쓰면서 화자인 나와 표현하는 언어를 다듬고 정돈하는 것 정도는 애교 수준이다. “그 영화 대박이야!”라는 말을 “그 영화는 무척 탁월했다.” 정도로 다듬는 게 독자를 위해서도 나를 위해서도 대체로 좋은 선택일 테니까.





 그러니 에세이는 꼭 솔직해야만 매력적이라거나, 반드시 있는 인물과 사건을 그대로 적어야만 좋은 글이라는 강박관념에서 조금은 벗어나도 괜찮을 것 같다. 솔직함의 죄책감에 아무것도 쓰지 않는 것보다, 이렇게 반쯤 허풍쟁이로라도 글을 계속 쓰는 게 훨씬 낫다.


 써야지만 알게 되는 것들이 있다. 써야만 붙잡아 감각할 수 있고, 확장할 수 있는 것들도 있다. 또한 써야 버릴 수 있는 마음도 있다. 그 과정에서 살고 싶은 나의 모습이 조금씩 나를 실제로 다듬어 간다.     

 그러니 쓰는 도중의 나와 쓰지 않는 일상의 나는 같을 수가 없는 건 당연하다고 반쯤은 합리화하며 다시 글을 쓴다. 때로는 나를 왜곡하는 문장을 용기 내어 쓰고, 때로는 배신하면서.

     

 물론, 과한 보정으로 누구인지조차 알아볼 수 없는 사진은 내 취향이 아니듯, 지나친 자기 미화와 왜곡을 경계하려고 애쓰지만… 이 경계에서 여전히 비틀거리는 나는 역시 만만이 중에 만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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