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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삼끼 Dec 30. 2023

문과인의 과학 활용법

백수의 자기 합리화


우리가 보는 것은 언제나 8분 전의 빛인데, 이러한 우주적 지연이 있다고 해서 해지는 풍경이 덜 아름답다거나 일몰 시간이 줄어드는 것은 아니다.

<우아한 우주>. 엘라 프랜시스 샌더스




 천생 문과 성향인 나도 과학적 지식을 기꺼이 받아들일 때가 있다. 물론 깊게 파고드는 건 아니고, 겉면을 살짝 손가락으로 찍어 혀끝에 대보는 정도지만. 말하자면, 나를 합리화할 수 있는 정보만 얌체같이 쏙쏙 골라 먹는달까.


 가령 인간의 DNA는 침팬지와 1.3퍼센트만 차이가 난다는 정보를 읽는다. 언젠가 읽었던 ‘침팬지가 유지할 수 있는 사회적 관계의 크기는 인간의 유지할 수 있는 관계의 크기의 1/3 수준이다’라는 정보를 떠올리며 이런 결론을 낸다.

 ‘내 사회적 능력치는 인간보다는 침팬지에 가깝다. 하지만 뭐, 인간과 침팬지의 DNA 차이는 고작 1.3퍼센트다… 그럼 나 정도쯤이야 얼마든지 정상 범주의 사회성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지.’

 물론 이 과정에서 내 사회적 능력치가 침팬지보다도 훨씬 떨어진다는 건 기억에서 밀어낸다. DNA에서의 1.3퍼센트가 종을 나눌 정도의 큰 차이인 것도 무시한다.




 그러니 <우아한 우주>의 위 대목을 이렇게 자기 합리화에 사용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우리가 빛을 통해 보는 모든 세상은, 결국 8분 전의 빛을 통해 보는 거다… 그럼 어차피 지연된 세상에서 사는 거, 좀 지연된 인생을 사는 게 딱히 큰일도 아닌 거네!’

 안 그래도 지연 인생을 사는 내게 이보다 유용한 정보가 없다.     



 대학생 시절, 수업 시간 정각까지 교실에 도착하지 못하면, 나는 포기하고 걸어가는 걸 택했다. 낮은 언덕 위, 학과 건물이 보이지만, 뛴다고 해도 2분은 걸릴 터였다. ‘ㄱ’으로 이름이 시작하는 내 이름 석 자는 출석에서 1분 안에 불릴 게 뻔하고, 1분 늦으나 10분 늦으나 어차피 내 이름이 호명되는 순간 ‘네’를 외치지 못하면 나는 저 수업에 참여하지 않은 학생이 돼버릴 테니까. 한 수업에 최소 70여 명은 듣는 수업이었기에 교수님은 학생 한 명 한 명의 드나듦을 신경 쓰지 않았고, 뒤늦게 간다고 그걸 출석으로 인정해 주지도 않았다. 운이 좋게도 ‘ㅎ’으로 시작하는 이름을 가진 친구가 나를 지나 헐레벌떡 뛰어가는 뒷모습을 보며 부러워했던가, 킥킥거리며 비웃었던가.

 20도 정도의 낮은 경사임에도 두툼한 전공책을 등에 메고 달리는 다리에는 근육이 터질 듯 볼록하게 잡혔다가 사라지고, 호흡은 시원한 아침 공기를 날카롭게 가르듯 거칠었다. 그토록 최선을 다해 달리던 건, 늦으면 없는 것과 마찬가지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건 가능성이 있는 사람의 호흡을 헐떡이게도 했지만, 반대로 완전히 느긋해지게도 했다. 


    

 본래의 천성도 이러했는데, 무려 천문학자님께서, 무려 우주의 지연에 대해 알려줬으니 문과인 된 도리로써 그냥 지나칠 순 없다.


 백수로 지내는 기간 동안, 아마도 나는 어떤 부분에서 다른 이들보다 지연된 삶을 살 것이다. 하지만 뭐 어떤가. 따지고 보면, 나는 공시생 시절을 보내느라 남들보다 이미 2년은 늦은 출발인데. 2년 늦으나 3년 늦으나, 어차피 지연된 삶이다.     

 대학생 시절 몇 번 지각했던 수업의 학점은 제법 괜찮았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학점 평가의 기준은 그 제시간에 존재했느냐보다, 시험 성적이 훨씬 높은 비율을 차지했다. 뭐, 그렇다고 아예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출석률이 낮으면 안 되었겠지만, 그 정도 지연 정도야 얼마든지 나중에 무마할 수 있었다는 뜻이다.



 그러니 지금도 마찬가지라고 꾸물꾸물 목구멍으로 올라오는 불안한 마음을 다독인다. 나중에 늙어서 남들보다 3년 더 건강하게 살면 된다는 마음으로, 몸을 건강히 하고, 마음 편안하게라도 천천히 걸어가는 게 훨씬 낫다고 말이다.

 우주의 빛에서 1분 거리에 있는 세상보다 8분 거리에 있는 세상의 풍경이 덜 아름다운 것이 아니듯, 그 7분의 거리 동안 빛이 보아온 무수한 세상이 있었듯 지연되는 시간에도 똑같이 삶은 있을 테니까.     



 좋아, 합리적 사고였다. 역시 이과의 책을 읽으면 논리적 사고를 하게 된다. 조금 오류가 있어도 괜찮다. 나는 문과인이니까.


     



#

 아, 이제 문과와 이과가 통합되는 방식으로 교육 과정이 개편된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들었다.

 교육적 측면에서 좋은 방향이라고 생각되지만, 문과인으로서 이과의 지식을 내 맘대로 얼렁뚱땅 가져다 쓰고 모른 척할 수 없게 될까, 걱정이다. 지연된 삶은 살아도 ‘라떼는’ 그런 지식을 배운 적 없으니 모른다며 우기는 꼰대는 역시 되고 싶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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