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삼끼 Feb 21. 2024

삶의 들러리와 주인공

뼈와 물건, 유골과 유물


 역사를 복원하는 데 기여할 수 있는 다양한 고고 자료 가운데 사람 뼈는 주인공이라기보다 늘 들러리였다. 아이러니하지 않나.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이 주인공이 되지 못하고 그 사람이 남긴 유물이 더 주목받는다는 사실이.

<뼈 때리는 한국사>. 우은진





 사람이 묻힌 유적지를 발견하면, 그 안의 사람 뼈보다는 함께 묻힌 유'물'이 더 관심을 받는다고 한다.

 삶에서 물건이 주인공이 되고, 사람이 들러리가 되는 현상이 꼭 사후에 해당하는 말은 아닌 듯하다. 살과 근육이 붙어 움직이는 뼈를 가진, 생을 살아가는 중인 지금도 별 다를 것이 없으니 말이다.


 언젠가 영수증 명세를 보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다는 말을 들었다. 식성, 취미, 반려동물 유무, 가구 구성원은 어떤지 등등… 자본주의 사회에서 어떤 소비를 하는가는 그 사람의 정체성이 된다.


 내 영수증을 분석하면 나라는 인간은 이렇게 파악되지 않을까. 

 “닭가슴살을 주기적으로 구매하는 걸 보아, 다이어트를 결심하고 자주 실패하고 또 도전하는군. 끈기가 없는 인간이겠어. 월 15만 원의 주유를 해야 하는 거리의 직장에 다니고, 의류에는 별로 관심이 없지만 책과 문구류에 관심이 많은 인간임이 분명해. 자가 아닌 전세로 사는 걸 보아 아마도 경제적으로 상류층은 아니고 평수를 보니 3~4인 정도의 가족 구성원을 이루고 사는, 탐폰을 구매하는 걸 보면 여성일 확률이 높겠어.”

     

 어디 이뿐이겠는가. 아마 파고들다 보면 나의 신체 사이즈, 기상과 취침 시간, 그 외에 나 스스로조차 인식하지 못하고 있던 나에 대한 거의 모든 걸 파해 칠 수 있을 것이다. 소름 돋을 정도로 말이다.


     




 그런데, 이게 정말 나의 다인가?

     

 어쩐지 그래서만은 안 될 것 같다. 설령 맞는 말이라고 해도, 반박하고 싶은 마음이 꾸물꾸물 올라온다. 위에 나열된 실재적 특징은 분명 나이지만, 그렇다고 내가 ‘단지 그런 사람인 것만은 아니’지 않나?


     

 물건이 아닌 한 사람을 볼 때, ‘사람’에서만 볼 수 있는 흔적이 있다. 

 웃는 근육을 타고 새겨지는 눈가의 주름, 자주 취하는 자세로 인해 눌리는 특정 부위의 뼈, 달리는 사람의 탄탄한 근육, 처진 살들을 따라 불룩불룩 굴곡진 곡선.

 꼭 뼈와 살에만 새겨진 삶의 흔적만도 아니다.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해 주변의 복장을 터뜨리는 우물쭈물함과 사실 다른 사람을 배려하던 다정함, 우유나 요거트를 먹으면 꼭 물로 씻어 말린 후 버리는 단정함, 힘들다고 하면 2주간은 매일 전화를 걸어오던, 더욱 쾌활하게 노력하던 마음이 느껴지던 목소리. 그 사람만의 웃음 코드나 화내게 만드는 역린.

 그리고 그런 것들을 알게 해 주었던 그와 내가 나누었던 시간은 영수증으로는 알 수 없는 그 사람과 나의 정체성이다.


         





 유물을 통해 우리는 그 시대의 기술 발전 정도, 소유자의 사회 경제적 지위 등을 파악한다. 그러나 유물 옆 누워있는 인간의 뼈는 아주 독특한 특징이 있지 않은 이상 들러리가 되고 만다. 우리는 그 사람을 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꼭 먼 옛날 죽은 자에게만 해당하는 말은 아닐 것이다. 오직 물건만이 나를 설명하는 삶을 살다 보면, 어느새 나는 삶의 주인공이 아닌 들러리가 되고 만다. 내 공간에 물건을 쌓느라 내 몸 둘 곳은 점점 찌그러진다. 웃는 주름과 단단한 근육을 만들기 위한 시간을 스마트 폰 스크롤을 내리며 인터넷 쇼핑을 하며 죄다 써버린다. 나를 나의 몸과 마음에 새기지 못하고, 살아서는 물건에, 죽어서는 유물에 남기게 될 것이다.


          



 사실, 내게 유물로 남길만한 물건도 없다.

 워낙 지류를 좋아하다 보니, 부모님의 “죽으면 그 종이를 다 가지고 갈 거냐.”는 말에 “무슨 소리야. 이 종이로 나만의 왕릉 정도는 만들어 줘야지.”라고 했다가 등짝을 맞을 정도의 종이는 쌓여있지만, 역시 유물로 인정받긴 어려울 것 같다. 재벌가의 누군가처럼 박물관을 만들 만큼의 예술품을 모으는 것도 요원해 보인다.


 그러니 역시 물건의 들러리로 사는 건 무척이나 억울한 일일 것 같다. 지금 당장 물건의 들러리로 산다면 결국 생의 전체가, 사후까지도 그렇게 될 테니 말이다.

이전 11화 무마하는 시간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