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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삼끼 Feb 25. 2024

미친놈, 답답한 놈, 멀쩡한 나

나를 미치게 하는 공간



운전자는 세 분류로 나뉜다고 한다.

나보다 빨리 가는 ‘미친놈’, 나보다 천천히 가는 ‘답답한 놈’, 그리고 ‘멀쩡한 나’

<아무튼, 정리 / 주한나>





#1. 세상에는 미친놈이 너무 많아서


 성인이 된 후, 인격을 급격하게 변하게 만든 장소가 두 곳이 있다. 하나는 회사고, 다른 하나는 내가 운전하는 ‘차 안’이다. 두 공간에서 배운 공통점은 이것이다. 바로 세상에는 상식 밖의, 아주 다양한 사람들이 많다는 것. 나는 유별날 것 없이 평범 그 자체인 사람일 뿐인데, 다들 그냥 평범하게 좀 살면 안 되나?


 이대로라면 인격 중 사람이라는 ‘인(人)’도, 품격의 ‘격(格)’도 몽땅 잃어버릴 것 같아 회사는 그만두었다. 그러나 대한민국 지방에 거주자로서 자차 운전은 포기할 수 없었다.     

 운전하다 보면 제2의 인격이 나온다고 한다. 그게 숨겨진 인격이 나오는 건지, 그냥 인격이 파탄 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나 역시 운전대만 잡으면 평소에는 꺼내지 않던 거친 언어들을 쉽게 내뱉는다. 하지만 도로, 특히 출퇴근 시간대에 운전대를 잡는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세상에 미친놈들이 왜 이렇게 많은지 욕을 안 하려야 안 할 수가 없다.




       

#2. 시속 60킬로미터의 속력으로 헤어질 사이


 미친놈이 위험천만하게 끼어든다. 나는 교통법규를 준수한 속도로 가고 있는데, 뒤에서 클락션을 귀에서 피가 나도록 울려댄다. 나는 창문을 꾹 닫은 채, 차 안이 터지도록 소리를 친다.

 “미친놈이 저기서 튀어나오면 어쩌자는 거야!”

 “머리만 들이밀면 다냐, 응, 안 비켜. 안 비켜 줄 거야. 알아서 가보세요.”

 “저렇게 빨리 가서 뭐 하냐. 그러다 저승길 빨리 간다. 봐 봐. 어차피 이렇게 신호등에 걸려서 다 만날 것을.”

 그들을 보면, 목숨이 아흔아홉 개는 되는 것 같다. 목숨 걸고 저렇게 공격적으로 운전해 봐야 고작 3~5분 빨리 갈 텐데, 말 그대로 ‘미친놈’이라는 말이 절로 튀어나온다. 그들의 공격에 나는 괜히 더 느리게 움직이는 오기를 부린다.

     

 미친놈을 보내고 나면, 하루를 48시간처럼 여유롭게 사는 답답한 놈을 만나게 된다.

 “아니, 도로 한가운데에서 내리려면 빨리나 내리던가, 뭐 하는 거야.”

 “여기 좌회전 짧다고! 지금 핸드폰 봤지! 아, 너는 갈 수 있다, 이거지? 나 출근 늦는다고!”

 “고속도로에서 시속 50으로 가는 건 뭐 하는 걸까요. 이러면 사고 더 난다고요.”

 그들 뒤에서 나는 열이 머리끝까지 차올라 날카롭게 경적을 울린다. 상대의 닫힌 자동차 창문을, 나 역시 창문을 꾹 닫은 채로 노려보며 욕지거리를 내뱉는다.

      

 사실, 그 욕이 닿지 못할 소리라는 걸 안다. 아니, 어쩌면 상대도 나도 서로가 누구인지 모른 채, 닿지 않을 거라는 걸 알기에 내뱉을 수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곧 시속 60킬로미터의 속력으로 헤어질 사이이며, 서로를 알지도 기억하지도 못할 것이므로. 상대의 얼굴을 마주 보는 일은 미친놈도, 답답한 놈도, 멀쩡한 나도 되도록 피하고 싶은 상황이다. 




         




#3. '차 안'과 '온라인' 언어


 일단 들이밀고 보는 위험천만한 끼어들기, 한 치의 양보도 해주지 않겠다는 굳은 의지가 보이는 앞 차에 최대한 바짝 붙어가는 거리감, 시끄러운 경적, 들리지 않아도 들리는 듯한 무수한 쌍욕들. 각자의 ‘차 속’이라는 공간에서 내뱉는 언어들을 보자면 어떤 공간이 떠오른다.


 서로의 공간 안에서 상대의 얼굴을 보지 않고 마음껏 감정을 표출할 수 있는 곳. 다시 만나도 그때 그 사람이라는 걸 알 수 없는 곳. 상대의 이름도 얼굴도 성별도, 심지어 목소리조차 알지 못해도 문자라는 형식으로 언어를 내뱉을 수 있는 공간. 온라인이다.


 인터넷 기사부터 개인 SNS까지,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욕과 비아냥이 난무한다. ‘ㅇㅇ 논란’에 찬반 의견이 갈려 서로를 소위 ‘개념 없는 사람’으로 몰고 간다. 고민에 대한 답은 ‘이혼해.’, ‘절교해.’, ‘퇴사해.’라는 극단적 단절로 끝나기 일쑤다. ‘아님 말고-’식으로 근거 없는 말을 퍼트리다 시속 60킬로미터보다 빠르게 사라진다. 로그아웃, 혹은 뒤로 가기 버튼을 누르기만 하면 된다. 실제 물리적 거리감은 지구 반대편만큼이나 멀리 떨어져 있을지도 모른다. 문제가 되면 계정을 지우고 새로 만든다.


 안타깝게도 차 안의 공간과 다르게, 온라인에서 대부분 언어는 실제로 전달되고 만다. 이토록 온라인 안의 언어가 문제가 되리라는 것을, 우리는 운전을 하는 차 안에서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개인의 방어벽이 확실한 공간에서 얼굴을 보지 않은 채 연결되는 언어는 때론 끔찍하다.



          

#4.


 완전 자율 주행이라는 말은 이제 워낙 많이 들어, 더 이상 공상 과학 속의 이야기가 아니게 되었다. 그 공간을 생각해 본다. 지금의 자동차 안 공간과는 많은 부분 다를 것이다.

 정해진 교통법규의 속도대로 자동으로 움직이며, 상대의 공간을 조금도 침범하지 않는 거리감과 단절감을 유지한 채 ‘차 안’은 철저히 개인적인 공간이 될 것이다. 운전을 하다 미친놈과 답답한 놈을 마주쳐 핏줄이 터지도록 욕할 일은 사라질지도 모른다.

 그 철저히 가려진 개인화된 공간 안에서 우리는 무엇을 하게 될까. 파탄 났던 인격을 조각조각 이어 붙여 다시 성숙한 인간이 될 수 있을까. 아니면 더욱 안전해진 개인의 공간 속에서 온라인에 접속해 더 열띤 언어를 내뱉게 될까.



         

#5. 문제는 미친놈이 아니라, 




 인격을 파탄 내는 두 공간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본다.

 

 퇴사의 순간, 마지막 인사까지 나는 그들의 얼굴을 보며 멱살을 잡는 대신 최소한의 품격을 지켰다. 삼십 년 넘게 체득한 사회성을 발휘해 웃었고, 상대의 기분을 배려하여 단어를 골랐다. 아마 상대도 그랬을 것이다. 갑작스레 퇴사 선언을 한 나 때문에 업무 공백이 생기고 인사팀과 기싸움을 해야 했지만 내게 예의를 지켜 마지막 서류 처리를 했다. 비록 그 안에서는 인간 혐오를 품었을지라도 말이다. 서로의 얼굴을 보고, 서로의 사정을 알고, 앞으로 어떻게 다시 만날지 모른다는 불안함이 인격의 선을 넘지 않게 해 준 셈이다. 인격을 변하게 하긴 해도 파탄까지는 막아준달까.

     

 언젠가, 앞 차가 도로 한쪽에 멈추더니 한참을 움직이지 않은 적이 있다. 뒤따르던 나는 화가 나서 신경질적으로 경적을 누르려던 순간이었다. 느릿느릿 문이 열리더니, 뒷좌석에서 한 할머니가 조심스럽게 발을 땅에 내디뎠다. 천천히 차 문에 기대 조심스레 바깥 공간으로 나왔다. 작고 마른 할머니의 모습이 아슬아슬해 보여, 경적을 누르려던 나는 숙연해져서 가만히 그 모습을 기다렸다. 만일 그때 신경질적으로 빵빵거렸다면 숙연해짐을 넘어 죄송스러워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을 것이다. 앞 차의 운전자는 나를 미친놈이라며 욕했을 것이고, 내 차에 가려 앞 상황이 안 보이던 내 뒤의 차는 나를 답답한 놈이라며 욕했을 것이다.

     

 어쩌면 인격을 파탄 내는 건 미친놈도, 답답한 놈도 아니라 철저히 개인성을 가려주는 '공간'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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