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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삼끼 Feb 22. 2024

우리는 왜 일을 미룰까?

미루는 사람은 게으르다는 오해


‘구조적으로 미루기(structural procrastination)’ 

 : 해야 할 일을 제쳐두고 그보다 덜 중요한 일을 처리하면서, 즉 구조적으로 미루면서, 해야 할 일들을 돌려 막기로 수습함

/<미루기의 기술>. 존 페리



     


 #1. 미루는 사람에 대한 변명


 미루는 사람의 변명을 시작하기에 앞서, 확실히 구분하고 넘어갈 것이 있다. 미루는 사람은 안 하려는 사람과는 다르다는 점이다.

 미루는 사람은 안 하거나 포기하기 위해서 미루는 척, 미루기를 핑계 삼는 사람과 다르다. 미루는 사람은 분명 ‘하겠다’라는 의지가 있다. 비록, ‘해내고야 말겠어!’보다는 ‘하긴 해야지… 할 거야…’의 뉘앙스에 가깝지만 말이다.

 그렇다. 나는 늘, 잘 미루는 인간이다.


          






#2. 잘 미루는 사람은 사실 성실하다.


 잘 미루는 사람은 세상으로부터 많은 오해를 받는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 ‘잘 미루는 사람 = 게으른 사람’이라는 평가다. 

 그러나 미룬다는 것은 어찌 보면 참 부지런한 습성이다. 특히 잘 미루는 사람일수록 미룰 수 있을 때까지 어떻게 해서든 미루기 위해, 심지어 ‘구조적’으로 까지 미루지 않나. 조금만 생각해 봐도 이 ‘구조적 미루기’는 무척이나 세심하며, 체계적인 능력을 요하는 일이다.

     

 우선, 더 중요한 일과 덜 중요한 일을 확실하게 구분 지을 수 있는 판단력이 필요하다.

 단순해 보이지만, 일의 경중을 파악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회사에서 중요한 프로젝트의 발표일과 자녀의 학교 행사가 겹친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또한 마감이 있는 시급한 일은 중요한 일일 가능성이 높지만, 아주 사소해서 망쳐도 별일이 아닐 수도 있다. 이 경우 시급하지만 중요하지 않은 일이 된다. 일의 양, 시급성, 영향력 등 다양한 요소가 복합적으로 그 일의 중요도를 결정한다.

 이렇듯, 수많은 ‘일’의 홍수 속에서, 미루는 사람은 어떤 일이 더 중요한지 본능적으로 감각해 순위를 매긴다.

 (비록, 그렇게 엄선한 중요도 순위에서 덜 중요한 일을 먼저 해버리는 바람에 종종 비효율적이라는 비난을 받곤 하지만.)

     

 두 번째로 ‘구조적 미루기’의 핵심은 덜 중요한 일을 ‘한다.’는 것에 있다. 비록 덜 중요한 일일지라도 사실 어차피 언젠가 해야 할 일이다. 즉, 앞으로 언젠가 해야 할 일을 미리 하는 것일 뿐이다. 미루기 위해 무언가를 ‘하면서’까지 노력한다는 점에서 그 성실성을 인정할 수밖에 없지 않나. 다시 말하지만, 미루는 사람들은 일을 안 하려고 게으름 피우는 것이 아니다.

 (물론, 당장 코앞에 닥친 일을 안 한다는 점에서 게으르다는 오해를 받는데, 사실이 아닌 셈이다.)


     

 이렇듯 구조적으로 잘 미루는 사람은 언뜻 보기에는 비논리적이며 게으른 사람으로 비칠 수 있다. 그러나 그 안에는 날카로운 판단력과 성실함이 있다. 12시까지 마감인 서류의 접수를 미루고 미루다가 11시 59분 43초에 보낼 정도로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는 집념도 있다.

 물론, 워낙 촉박하다 보니 아주 가끔 변수가 생기는 바람에 일을 못 하게 되는 경우가 생겨서 ‘할 생각이 없냐.’는 오해를 받기도 하는데, 그건 정말 오해다. 안 하려는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하려고 했다. 정말이다!



          




 #3. 더 중요한 일은, 더 두려운 일이다

   

 그럼 이런 뛰어난 판단력과 성실함과 집념을 갖춘, ‘잘 미루는 사람’이 대체 왜 일을 미루는 걸까? 더 중요한 일이 무엇인지도 알고 있고, 그 일을 하겠다는 의지도 있으며, 해낼 수 있는 성실함조차 지녔는데 말이다.

 어쩌면 더 중요한 일을 미루는 까닭은, 아이러니하게도 ‘중요한 일’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중요한 일은 그만큼 내 삶에 끼치는 영향이 커다랗다는 말이다. 중요한 프로젝트는 언젠가 내 승진과 연봉에 영향을 미칠지도 모른다. 내일의 시험 성적이 대학 입시에, 그리고 취업에까지 내 삶을 변화시킬지도 모른다.

 내 삶에 중요한 일은, 주로 타인에 의해서 ‘평가’ 받는다. 오랜 시간과 깊은 마음을 들여 해낸 일이, 내 손을 떠나는 순간 더는 돌이킬 수 없게 된다. 타인과 조직은 내가 최선을 다한 일을 평가하고, 내 삶은 그들의 평가에 의해 바뀌곤 한다.

 심지어 내가 중요한 일이라고 여긴 그 일이, 남들에게는 중요하지 않은 일이라는 걸 인정해야 하는 순간도 많다. 3주간 공들여 만든 서류가 3초 만의 전산 작업으로 입력되는 데이터 값 정도로 넘겨지는 광경을 목격하기도 한다.


 이렇듯 대부분의 더 중요한 더 많은 평가를 받으며, 설령 평가받지 않더라도 내 삶의 궤도를 변화시킬 정도로 큰일이다. 결국 더 중요한 일은, 더 두려운 일이다.


          







#4. 중요한 일은 사실 별로 중요한 일이 아니다.


 사실 미루는 사람들을 변론했지만, 늘 미루는 사람으로서 늘 후회한다는 점을 고백한다. 사실은 미루고 싶지 않다는 말이다. 그리고 최근에는 아주 약간은 미루는 습성을 변화시켜 나가는 중이다. (완전히 없앴다고는 하지 않았다.)


    

 더 중요한 일을 자꾸 뒤로 미룬다면, 사실 방법은 간단하다. 더 중요한 일이, 사실은 별로 중요한 일이 아니라는 걸 깨닫는 거다.

 우리가 더 중요하다고 여겨, 압박감과 두려움까지 느끼는 그 일이 정말로 내가 정한 기준에서 중요한 일인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남들에 의해 판단되는 일은, 사실 남들이 중요하다고 정한 일일 가능성이 크다. 더 나아가, 중요하다고 여겼던 그 일은 생각보다 내 삶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삶의 궤도를 바꿀 수도 있으나, 꼭 안 좋은 방향으로 틀어진다는 의미는 아니다. 의외로 생각지도 못한 즐거운 세계를 살 기회가 될지도 모른다.

     

 중요한 일이 사실은 별로 중요한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그것은 더는 미룰 필요가 없는 일이 될 수 있다. 시험공부를 하기 전 책상을 치우는 것이나, 회사 보고서를 작성하기 전 단순한 지출 서류를 처리하는 것처럼, 그냥 지금 가볍게 해 버리는 ‘덜 중요한 일’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물론, 나는 여전히 일을 자주 미룬다. 여전히 ‘해내고야 말겠어!’라는 의지 따위는 없다. 그래도 비척비척 일어나 시작한다.

 ‘그래… 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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