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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새미 Jan 16. 2024

주간 새미일기

2024.01.08(월)~2024.01.12(금)

2024.01.08 (월)

딸 하나에 아들 하나를 두었다고 하면, "금메달이네" "200점이네" 하고 말씀하시는 어른들을 만난다. 자식을 몇을 낳고 성별을 어떻게 낳느냐가 어떻게 점수와 순위를 매기는 일이 될 수 있겠냐만은 어른들은 신기하게도 그것에 대한 나름의 규칙이 있는 듯하다. (아님 그냥 누구에게나 그렇게 말씀해 주시는 것일지도;) 하지만 나에게 있어서는 가을이가 내 딸이라는 것이, 그리고 그런 가을이가 여름이의 누나라는 것이 바로 금메달인 것 같다. 오늘 저녁에는 아이들에게 계란밥을 해주었다. 그런데 식탁에 앉아서 반쯤 잘 먹던 여름이가 갑자기 방에 들어가 자동차 장난감들을 가지고 놀기 시작했다. 여름이의 그 행동은 전혀 놀랍지 않았다. 내가 놀랐던 것은 그다음 가을이의 행동이었다. 내가 부엌을 정리하느라 정신없는 사이 가을이가 계란밥을 한 숟갈 떠서 방에 들어가 여름이를 먹이고 온 것이었다. 그러고는 뿌듯한 표정으로 "내가 주면 잘 먹어!^^" 하는 게 아닌가. 나중에는 (자기 밥을 다 먹고) 아예 여름이가 남긴 밥을 그릇째 들고 들어가 여름이 옆에 앉아 먹이기 시작했다. 여름이는 정말 놀면서 누나가 주는 밥을 잘도 받아먹었다. (결국 그렇게 방에서 놀면서 나머지 반그릇을 다 먹었다.) 밥이 먹기 싫어서라기보다는 어느 정도 배가 찼으니 놀고 싶어서 방으로 들어갔던 모양이다. 동생을 저렇게 챙겨주는 가을이의 행동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가르친 적이 없는 나는 볼 때마다 놀란다. 가을이가 여름이를 엄마처럼 챙겨줄 때마다 드는 생각은 '김여름 너는 좋겠다. 누나가 가을이라서'인데, 오늘은 '장새미 너는 좋겠다. 딸이 가을이라서'다. 나는 오늘도 가을이 덕에 '갓생'산다.


2024.01.10 (수)

여름이는 요즘 나에게 애정을 표현할 때, "좋아해~"라는 말을 한다. 그 말을 들으면 일단 웃음부터 나온다. 왠지 모르게 모든 것이 괜찮아진다. 오늘도 저녁 식사를 하는데 옆에 앉아 밥을 먹던 여름이가 내 무릎에 올라와 앉고 서고, 그러다 뒤에 가서 업히기까지 하는 것이었다. 저녁밥도 편하게 먹을 수가 없다. 식사에 너무 방해가 되자 "여름아 엄마한테 왜 그래 ㅠ" 했더니 여름이 왈. "엄마 좋아해서 그래~"하는 게 아닌가. 그것도 내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 안고 내 눈을 자기의 웃는 눈으로 응시하며 그렇게 말했다. 좋아서 그런다니 할 말이 없다. 여름이가 말이 늘수록, 나는 거꾸로 말문이 막힌다. 어쩔 수 없이 또 웃어넘긴다. 이렇듯 좋아한다는 말은 왠지 모르게 강력하다. 아이를 키우다 보면 생각보다 사랑한다는 말을 생각보다 자주 하게 된다. 마치 정해져 있는 멘트처럼 이렇게 저렇게 아이에게 사랑을 고백한다. 그런데 사랑한다는 말은 그렇게 흔하지만 어렵다. 나조차, 아이를 사랑하는 게 분명한데도 사랑이 무어라 꼬집어 말하는 건 어렵다. 그런데 좋아한다는 건 덜 어렵지만 생각보다 흔하지 않다. 어떠한 물건이나 행위에 대해서는 좋아한다는 표현을 많이 써도 사람을 대상으로 좋아한다는 말은 생각보다 자주 쓰지 않는 것 같다. (나만 그런가? 남편이랑도 그렇고, 가족끼리는 사랑한다고 하지 좋아한다고는 잘 안 하는 것 같다.) 그래서 그런지 아이가 나에게 좋아한다고 말할 때 제법 신선했다. 아이도 나도 사랑을 정의하기 어려워 운 것은 마찬가지다. 그렇기에 좋아한다는 표현이 좀 더 솔직하고 진실한 말일 수 있겠다. 아이의 입장에서는 더욱 그렇다. 그렇다고 아이가 나에게 사랑한다고 말하는 표현이 덜 진실하다는 말은 아니다. (절대 아니다. 내가 아이에게 사랑한다고 말할 때의 진실성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사랑보다는 가볍지만 "좋아해"가 가지는 그 왠지 모를 순수함과 아이다움이 나를 웃게 하는 것은 분명하다. 사랑한다는 말은 마음을 가득 차게 하지만, 좋아한다는 말은 마음을 녹아내리게 한다. 왜인지는 모르겠다. 여름이가 그렇게 말해서 알았다.


2024.01.11 (목)

아이 둘을 등원시키고 나면 혼자 잠시 멍 때리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나는 아침잠이 많은 사람이다. 어젯밤도 아이들 재우다가 같이 잠들어서 12시 반에 번뜩 눈을 뜨고 말았다. 그제야 이를 닦고 내 시간을 좀 가지다 보니 새벽 3시가 다돼서 잠이 들었다. 가뜩이나 아침에 일어나는 걸 힘들어하는 난데, 여름이는 꼭 갑자기 무슨 알람 울리듯이 "엄마 일어나! 일어나!" 하며 소리 높여 운다. 내가 침대에서 일어날 때까지 여름이의 자체 알람은 계속된다. 예고도 없이 훅 들어온 아이의 울음소리에 나는 정신을 차리지 못한 채로 일어난다. 그렇게 아침을 차리면서 정신을 차리려고 노력하는데, 이번에는 애 둘 흘린 거 닦고, 요구사항 들어주고, 가방을 챙기고, 등원준비를 시키느라 정신이 없다. 괜히 등원을 '전쟁'이라는 수식어를 붙여 표현하는 게 아니다. 그 한바탕의 난리를 끝내고 '등원완료'를 하고 나서 집에 들어오면 기운이 쪽 빠져있다. 아직 정신도 온전히 돌아오지 못한 상태다. 그러고 나면 식탁에 앉아 아까 미처 다 먹지 못했던 아침을 마저 먹으며 한숨을 돌린다. 그렇게 식탁에 앉든 소파에 앉든 침대에 눕든, 나 혼자서 아무 말도 안 하고 가만히 (음악도 없이. 아무 소리도 없이) 멍 때리는 시간을 좀 가져야 한다. 어젯밤에 분명 다 정리하고 잤는데 왜 등원만 해도 온 집안이 난리통이 되는지는 모르겠으나, 엉망이 된 집을 정리하는 것도 바로 돌입할 수 없다. 꼭 그 멍 때리는 시간을 잠시라도 가져야 한다. 내 생각에 그것은 다시 나의 정신을 불러들이는 시간인 것 같다. 그렇게 정신을 차려야 뭐라도 다음 일을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멍 때리다 그대로 한숨 자고 싶을 때가 대부분이지만, 빨래를 돌려야 한다. 일어나자.

2024.01.12 (금)

어제 유치원에서 가을이를 하원시키는데, 담임 선생님께서 그날 아이들과 했던 활동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셨다. 새해가 돼서 아이들과 이루고 싶은 소원에 대해서 적어보는 활동을 했다고 하셨다. 그런데 선생님은 가을이의 소원이 인상적이었던 모양이다. 왜냐하면 가을이가 작년 추석에 '소원등' 만들기 활동을 하면서 적었던 소원과 같은 소원을 적었기 때문이었다. 그 소원은 이랬다. "가족이랑 하늘을 날고 싶어요." 다소 비현실적인 소원이라 그때도 인상적이었는데, 같은 소원을 해가 바뀐 지금도 똑같이 갖고 있다는 것이 더 인상적이었다. 선생님도 그러셨나 보다. 그래서 정말 가을이랑 '페러글라이딩 같은 활동이라도 하러 가야 하는 건가' 하는 생각과 함께 가을이가 어떤 마음으로 그런 소원을 또 적었는지 궁금하시다는 듯 말씀을 하시는 거였다. 그 말을 듣고 보니 나도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집으로 돌아오면서 가을이에게 패러글라이딩이랑 스카이다이빙 같은 활동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렇게 하늘을 나는 것과 비슷한 활동을 할 수 있다고... 가을이 나이에도 할 수 있는 활동인지는 알아봐야겠지만 혹시 가능하다면 그런 활동을 해보고 싶느냐고 물었더니, 하고 싶다고는 말하지 않았지만 궁금하기는 하다며 웃어 보이는 가을이었다. 딱히 그런 레저 활동도 아니라면 정말 어떻게 날고 싶다는 거지? 싶어서 "가을이는 왜 그런 소원을 적었어?"하고 물었더니 "가브리엘 천사처럼 날고 싶어서!"라고 하는 게 아닌가. 아... 천사처럼 날고 싶다라... 어떤 것을 타고 싶은 게 아니라 정말 순수하게 날고 싶은 거구나... 흠... 뭐라고 반응해주어야 하지....;;;ㅎ 그와 비슷한 활동은 할 수 있지만, 인간이 나는 것은 불가능한데... 하는 생각이 제일 먼저 들었던 것이 사실이었다. 결국 현실의 벽에 부딪힌 나는, 언젠가 페러글라이딩이라도 같이 타러 가봐야겠다는 생각을 하는 것으로 일단 일단락을 맺었다. 남편도 비슷하게 생각했다. 그러고 그는 수원 화성에 열기구를 타는 활동을 알아보았다. 그리고 나는 오늘 밤에 굉장히 즉흥적으로 동생, 그리고 엄마와 심야영화를 보러 갔었다. 영화 이름은 '위시'였다. 내가 그 영화를 보고 나름대로 받았던 메시지는 이랬다. "어떤 소원이든 이루어지고 안 이루어지고 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소원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중요하다." 그러고는 가을이가 많이 생각이 났다. 실제로 그 영화에서도 하늘을 나는 것이 소원인 사람이 등장했다. 같이 영화를 보던 엄마도 그 영화를 보면서 "가을이 같네!"라고 했었다. 그래 맞다. 현실적으로 가능하던지 불가능하던지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다. 아이의 마음에 그 소원이 있다는 것 자체가 중요한 것이다. 그리고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그 소원을 이루어주는 것이 아니라 그 소원을 간직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다. 남편과 나는 그 소원이 비현실적이라고 했었다. 그런 우리의 말에 내 동생은 그렇게 말했다. 핸드폰으로 이렇게 사진을 찍게 될 수 있으리라고 상상이냐 했었냐고, 또 모르는 거 아니냐고 나중에 우리가 정말 맨몸으로 날 수 있게 될지. 그래 맞다. 이룰 수 있는 것인지 아닌지 조차 우리는 알 수가 없다. 그러니 우리는 아이의 소원에 대해 함부로 결론지으면 안 되는 것이다. 아이가 언제까지 그 소원을 간직하고 있을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지만, 늘 꿈꾸는 사람이 되었으면 한다. 그것이 이룰 수 있는 꿈이든 아닌 든 상관없이 말이다. 그런 사람으로 자라게 하려면 나는 어떤 어른 이어야 할까 생각해 본다. 나야말로 꿈이 있는 어른이어야 한다. 아이가 가장 많이 만나는 어른이 나이기 때문이다. 내 꿈은 무얼까. 내 소원은 무얼까. 나도 내 소원을 생각해 보고, 적어보고, 아이와 이야기 나누어 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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