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는 회사의 친한 동료에게 새로운 식물 '피쉬본' 들였다고 자랑삼아 말했더니 곧바로 이런 대답이 돌아왔다. 뜨끔해진 나는 죽이려고 키우는 거 아니라며 발끈했지만, 따지고 보면 완전히 틀린 말도 아니다.
8년간 자칭 '식물 집사'로 살면서 참 많은 식물을 죽였다. 물을 많이 줘서 죽고, 물을 적게 줘서 죽였다. 한여름 장마철의 습도에 벌레들의 공격이 더해져 죽고, 어떨 땐 도저히 이유를 찾지 못한 채 시름시름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봤다. 기억에 남는 죽음도 있다. 순간의 실수로 얼어 죽은 벤자민 나무. 별처럼 빛나던 잎사귀를 모두 떨군 채 얼어붙은 벤자민 줄기를 부여잡고 나는 엉엉 울었다. 어쩌면 정말로 나는 식물을 죽이려고 키우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나는 매번 끊임없이 새로운 식물을 들인다. 그때마다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다짐하고, 정보를 검색하고, 부족한 스스로를 바꾸어 나간다. 오래 함께 할 수 있기를 바라며 진심을 다해 그들을 돌본다. 이런 나를 보며 남편은 자주 놀리곤 한다. 식물에게 쏟는 정성만큼 집안일에도 관심을 가져보라며 은근한 핀잔을 준다. 이 정도의 핀잔은 가뿐히 웃어넘기며, 오늘도 열심히 식물들의 물시중을 들었다.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문득 궁금해졌다. 나는 왜 이리도 식물을 좋아하게 되었을까? 그들은 나에게 어떠한 이점을 주고, 나는 그들과 무엇을 나누며 사는 것일까? 대체 왜 나는 그들을 사랑하는가?
우리 집 식물들은 크지 않다. 대품이 될 만큼 키운 적도 없고 개인적으로도 소품을 선호하다 보니 화분 크기가 커봤자 지름 14센티미터다. 그 작고 소박한 세상에서 영차 영차 뿌리를 내리고 새순을 올린다. 성실한그들이 있는 힘껏 삶을 이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나 또한 하루를 생기 있게 가꾸는 힘을 얻는다. 때론 지친 퇴근길 나를 반겨주는 변함없는 모습에서, 어떤 날엔 반짝이는 햇살을 머금고 바람에 살랑이는 모습에서 나는 알 수 없는 위로를 받고 일상을 살아간다. 사람들은 자신이 식물을 키운다고 믿지만 어쩌면 식물이 사람을 키우는 것인지 모른다. 내게 식물을 돌보는 일은 곧 나를 돌보는 일이다.
3월이다. 외출을 했다 돌아오는 길에 상쾌한 봄의 기운을 느꼈다.식물 집사 들은 봄을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봄엔 어떤 식물이라도 새순을 마구 올리며 성장하기 때문이다. 나도 마찬가지다. 아마 평소였다면 또다시 새로운 식물을 들일 생각에 잔뜩 흥분했겠지만, 이번엔 그러지 않았다. 지난겨울 떠나보낸 뱅갈 고무나무가 남긴 빈 화분을 생각하면 조금은 허전하지만, 올봄엔 식쇼(식물 쇼핑) 대신식물의 이야기를 꺼내어 보고 싶다.
삭막한 도심에서의 삶을 싱그럽게 가꿔주는 소중한 존재들. 그들과 함께 해온 지난시간을 돌아보며, 그간 내가 받았던 다정한 위로의 순간들을 기록하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