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물 오염
통깨를 솔솔 뿌린
김치 한 점 올린 쌀 밥
아침저녁으로 시원한 바람이 부는 걸 보니 곧 김장 시즌이 오나보다.
근처에 사는 친척들이 우리 집에 모여 할머니 주도하에 김치를 담그고,
수육을 삶아 양념에 버무린 김치에다 싸 먹고, 왁자지껄 이야기를 나누며
김치를 서로 더 가져가라 챙겨주던 가을밤이 그렇게 즐거웠던 시절이 있었다.
김장을 진두지휘하시던 할머님이 돌아가시고
시간이 흐르면서 친척들과는 서서히 서로 간 왕래가 엷어지고
무거운 절인 배추와 씨름하며 많은 김장을 해내기엔 우리도 역시 나이를 먹었다.
김장 전 오래전부터 재료를 준비, 보관, 손질하는 데는 많은 시간과 노동력이 든다.
김장철마다 고정 단골 뉴스거리인 김장 물가도 예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이 올랐다.
가장 슬픈 건 그렇게 힘들게 김치를 담가도 같이 나눌 사람들이 없다.
아주 서서히 가을철 김장 문화가 사라지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대부분 아파트 생활을 하는 요즘
누구네가 거실에 비닐을 깔고 김장을 담근다는 말을 들으면 너무 대단하고
존경스러워 보이기까지 한다.
대형 마트에 가면 포기김치, 총각김치, 묵은지, 백김치, 파김치까지 온갖 김치들이
깔끔하게 포장되어 있으니 우리는 '돈'만 지불하면 김치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돈이 문제지,
김치는 문제가 아니다.
생수 시장이 처음 열릴 무렵,
많은 사람들은 물을 돈 주고 사 먹는다고? 라며 반문했었다.
지금은 사 먹는 것이 너무 당연하게 됐다.
즉석밥도 생수와 같았다.
'잠깐만 기다려, 얼른 밥 안쳐줄게' 라며 엄마가 해주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쌀 밥의 이미지는 어느샌가 즉석밥으로 바뀌고
물도 잘 맞고 심지어 밥 맛까지 더 좋은 즉석밥이
엄마가 해준 밥의 자리를 서서히 차지하며 식탁 위로 올라왔다.
김치, 소고기 장조림, 깻잎장아찌, 매운 게장, 동치미......
손이 많이 가는 우리 음식들, 한식은 엄마만의 맛이 아니라 식품회사 레시피 개발자의
맛으로 모두 다 바뀌었다.
난 남의 집에서 만든 김치를 먹지 못했다.
까다로운 입 맛이었을까?
다른 집에서 만든 김치에 들어간 젓갈이나 굴과 같은 양념들이 내 입에는 잘 맞지 않았다.
친구 집에 놀러 가서 밥을 먹을 때 김치가 있으면 늘 긴장됐다.
먹기는 해야 되겠고, 입에 넣었을 때 맞지 않는다고 해서 뱉지 말도록
교육받았던 지라 긴장감이 더 했었다.
그래서 다른 건 몰라도 김치는 꼭 우리 집 김치만 먹었다.
김치에는 새우젓이 꼭 들어갔다.
새우젓이 들어가면 김치에서 '감칠맛'이 난다.
요리를 조금 아는 지금에는 아미노산의 작용으로 그런 맛이 난다는 것도 알고
비싼 새우젓 대신에 마법의 가루를 넣어도 비슷한 맛이 난다는 것도 안다.
김치 재료가 조금씩 비싸지면서 중국산 김치가 거의 모든 식당 테이블에 올라왔다.
아니나 다를까 중국산 김치에서 기생충알이 발견되는 사건이 터지면서
중국산 김치 혐오는 아직까지도 진행 중이다.
어떤 식당에 가면 큼지막하게 '직접 담근 국내산 김치만 사용'이라며 소비자의 불신을
막고자 광고물을 붙여놓고 있다. 모든 물가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오르고 있는데
식당에서 중국산 김치를 쓴다고 타박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직접 담근 국내산 김치를
제공해주신다니 감사할 따름이고 그 식당엔 한 번이라도 더 가게 되는 사람이 나뿐만은 아닐 거다.
새우젓은 강화 새우젓이 가장 유명하다.
강화 앞바다에서 잡히는 새우는 가격도 비싸고 품질도 좋다.
그런데, 강화 앞바다로 들어가는 서울 한강물이 전 세계의 100여 개 넘는 강들 중에서
약물 오염 농도가 43위로 약물에 오염된 것으로 결과가 나왔다.
서울 한강물
약물 오염 농도 세계 43위
많은 사람들이 복용한 약물들이 대소변을 통해 배설되는데 현재 운영 중인
하수처리 시스템으로는 물에 용해된 약물을 제거할 수 없다.
한강에서 가장 많이 검출된 약물은 당뇨약 성분인 ‘메트포르민’이었다.
두 번째로 많이 검출된 약물은 통증 억제와 간질 발작 치료제인 ‘가바펜틴’,
세 번째는 카페인, 네 번째는 당뇨병 치료제인 ‘시타글립틴’ 그리고,
‘코티닌’, 통증 치료제인 ‘프레가발린’ 순이다.
한강은 약물에 중독됐다.
한강물은 강화 앞바다로 흘러가고, 강화도의 새우들은 한강에서 흘러 들어가는
당뇨약 성분과 발작 치료제 성분을 피할 수는 없을 것이다.
누구를 탓할 것인가?
맛있는 김치의 양념,
맛있는 갈비 한 점,
맛있는 치킨 다릿살.
모두 우리가 버린 약물, 우리 몸에서 나간 약물로 절여지고
다시 우리 입을 통해 몸으로 들어와서 영향을 줄 것이다.
나노 플라스틱이 생선살에서도 발견되는 극도로 오염된 세상에서
나만 혹은 우리 가족만 특별히 오염에서 벗어나길 바란다는 것은 부질없다.
피한다고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보이지 않는다고 없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사용하는 모든 소비재들이
조금씩 조금씩 지구의 어딘가를 썩게 하고 있다.
하지만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는다.
- 안산술공방 이정욱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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