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한다고 닳는 거 아니잖아요
아파트에서 엘리베이터나 계단을 오르내릴 때, 같은 라인에 사는 주민들을 종종 마주친다. 나는 그럴 때마다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를 하는데, 보통 세 부류로 반응이 나뉜다.
첫 번째 부류 : "네, 안녕하세요!" 큰소리로 반갑게 화답해주는 유형. 대부분은 자주 마주치는 사람들이지만, 처음 보는 사람들 중에도 그런 분이 있으면 괜히 기분이 좋아진다.
두 번째 부류 : "아, 네? 네.." 살짝 당황하시면서 인사를 받아주거나 목례로 지나가는 유형. 내가 사는 곳에서는 이런 경우가 제일 흔한 것 같다.
세 번째 부류 : "......" '설마 나한테 한 거겠어?'라는 느낌으로 그냥 지나쳐 가는 유형. 상처를 안 받으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조금은 받게 된다. 못 들었나 싶어서, 다음에 만나면 더 크게 인사해야지 다짐한다.
첫 번째 부류의 인사를 잘 받아주시는 분들과는 동네 구멍가게에서 우연히 만나도 기분 좋게 인사하고 더 잘 지내고 싶은 반면, 두 번째나 특히 세 번째 부류의 사람들과는 굳이 인사해야 되나 하는 마음이 들기도 한다. 그런데 반대로 나도 인사를 갑자기 받으면 두 번째나 세 번째와 같이 반응할 때도 있다. 그러면 꼭 집에 들어와 후회한다. '아, 제대로 인사할 걸...' 나는 과연 우리 동네 주민들에게 첫 번째 부류의 사람으로 기억되고 있을까.
"아니 무슨 신입사원들이 이 모양이야! 인사할 줄 몰라??"
지나가다 다시 돌아와 호통을 치시는 옆팀 전무님에 신입사원은 당황하고 놀래서 눈만 껌뻑 껌뻑.
신입사원 첫 부서 배치를 받고 앉은자리는 당시 여러 해외영업 담당팀이 함께 일하는 오피스 입구 자리. 왼쪽을 돌아보면 바로 문을 마주 보게 되는 자리라서, 사무실로 들어서는 모든 직원은 내 왼쪽 옆통수부터 보면서 하루를 시작한다. 그래서 출근 전에 왼쪽 머리 헤어스타일에 특히 신경을 썼다는 이야기는 다음 기회로 미루고... 내 앞자리와 오른쪽 자리는 각각 다른 팀 신입 동기들이었는데, 신입의 애환을 나누며 서로 의지하고 지내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옆팀 전무님이 우리 자리로 오시더니 인사도 안 하냐며 크게 꾸짖으셨다. 사실 처음엔 조금 억울했다. 내 자리에 앉아 있으면 온갖 사람들이 직원들 자리를 물어보기도 하고, 심지어 핸드폰도 빌려 쓰기도 하는 자리다 보니, 누구든 눈에 보이면 꼭 인사를 하곤 했었다. 그날따라 동기들과 대화하느라, 전무님이 지나가신 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사무실 공간에서 서열이 제일 높은 축이었던 분이 제일 말단 신입 직원을 대놓고 호통친 상황에, 그 사이에 있는 모든 사람들, 즉 선배 전원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그날 결심했다. 이젠 단 한 명도 놓치지 않고 인사하리라. 오기가 생긴 나는, 아예 왼쪽 문을 바라보면서 일했다. 일일이 출근하는 모든 직원에게 큰소리로 "안녕하세요!". 아침마다 근 한 시간 반 정도를 문을 주시하며 일을 한지 한 달 정도 지난 어느 날, 옆팀 과장님이 내 자리까지 오셔서 과자를 주시는 거다. 무슨 일인가 고개를 들어 인사를 드리니,
"인사 너무 잘하셔서 고마워서 선물드려요."
오, 나 칭찬받았나 봐. 이후로도 이런 일은 자주 생겼다. 주변 부서에서 나에 대해 알게 되었고, 인사 잘한다는 평판이 사내에 주욱 돌았다. 그렇게 주위 동료의 호감을 얻을 수 있었고, 그 덕에 교류가 늘어나 다른 팀과도 함께 일할 기회도 생겼다.
"그 친구 있잖아. 인사 잘하는 친구. 우리 팀 사원 교육에 같이 와서 들으라 해도 좋을 것 같아."
'인사가 불러온 나비 효과'라고 하기엔 조금 거창할 수도 있지만, 이렇듯 작은 행동의 실천으로 많은 변화를 경험했다. 결국 신입시절 만난 전무님 덕분에 조직생활에서 인사는 단순히 안부를 묻는 것이 아닌, 사람들의 마음을 살 수 있는 매력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마음에 새길 수 있었다.
"선배님 안녕하세요, 저는 INSEAD XX클래스 OOO입니다. 이렇게 인사드리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MBA 졸업 후 구글로 이직한 뒤에, 링크드인이나 학교 데이터베이스를 통해 학교 후배들로부터 많은 연락을 받았다. 나도 MBA에서 취업준비를 하면서, 여러 선배에게 조언을 구하고 도움을 받은 기억이 많아, 가능한 한 내가 아는 것들을 다 알려주려고 한다. 후에 큰 도움이 되었다며 고맙다고 인사가 오거나, 좋은 결과를 얻지 못했지만 마음 써줘서 감사하다는 연락을 받으면, 그게 큰 힘이 되어 더 많은 이들에게 도움이 되어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그런데 워낙 많은 후배들에게 연락을 받다 보니 다양한 인간군상을 만나게 되었고, 항상 좋은 일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안녕하세요, 구글에 들어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자기소개도 없는 사람이 다짜고짜 용건만 보내오는 경우도 있었다. 그래도 열심히 설명해주면, 필요한 게 충족되었는지, 대꾸조차 없다. 그리고 얼마 뒤에 다시 내 도움이 아쉬웠는지 다른 질문을 툭. '그래, 얼마나 지금 마음이 초조하고 급할까.' 생각하며 그래도 좋은 마음을 갖고 답을 보내면, 또다시 읽씹. 이쯤 되면, 나도 사람인데 감정이 안 생길 수가 없다. '내가 왜 이런 사람들까지 도와줘야 되지?'라는 생각이 스멀스멀 기어 올라오며, 좋은 마음으로 도와줘야겠다는 마음이 급속도로 식어간다.
그런 반면,
"바쁘실 텐데, 도움 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제가 나중에 찾아뵙고 직접 인사드릴게요."
라는 따뜻한 인사. 말만이라도 너무 고마웠다. 결국 직접 찾아와서 인사한 사람도 있고, 그 뒤로 종종 안부를 나누는 사람도 있다. 이런 사람이라면 내가 무엇인들 안 도와주고 싶을까.
좋은 마음으로 도와주는 선한 의지가 '인사' 하나에 허탈함과 분노로 바뀔 수도 있다는 게, 우습기도 하지만 어쩌겠는가. 그런 게 사람 마음인걸.
"안녕하세요."
오피스를 오며 가며, 누구든 마주치면 미소와 함께 인사를 주고받는 동료들.
지금 다니는 회사를 더 좋아하게 된 이유 중 하나이다. 각 나라의 오피스마다 다르기도 하니 일반화하기는 어렵지만, 내가 지금 일하고 있는 오피스에서는 누구든 마주치면 자연스레 인사를 한다. 서로 웃으며 인사하다 보니, 인사를 안 할 때보다 서로에게 호감이 올라갈 수밖에 없다.
"복도에서 인사만 드리다가 업무로 뵙는 것은 처음이죠? 반가워요 OOO예요. 항상 웃으면서 인사 주셔서, 언제 한번 1on1 하면서 말씀 나누면 좋겠다 생각했는데, 마침 업무로 뵙게 되네요."
이렇듯 평소에 인사는 나누지만 일해본적 없던 동료들과 업무에서 만나게 되면, 이미 가까운 사이처럼 느껴져 업무 진행에도 더 도움이 되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얼마 전 '불편한 관계'에 관한 글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평소에 인사 한번 나눈 적 없던 동료들과 업무로 갑자기 부딪히게 돼서 어려웠던 경우가 떠오른다. 확실히 호감을 바탕에 깔고 시작하는 관계는 아예 모르는 사이보다 업무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걸 보면서, '인사'의 힘을 다시금 절감할 수 있었다.
"안녕하세요!"
주말 번화가. 처음 보는 사람이 내게 손을 흔들며 인사한다. '누구지?' 무언가 이상하지만, 나도 따라서 손을 흔들며 "안녕하세요." 그 사람 표정이 살짝 미묘해지는 것 같더니, 나를 휙 지나 내 뒤에 있던 사람과 악수를 한다. '아... 민망해 죽을 것 같다...' 지금도 흔들고 있는 내 손은 어떻게 마무리해야 될지 몰라 갈 길을 잃었다.
인사를 열심히 하려다 보니, 은근히 이런 뻘쭘한 경험도 많이 겪었다. 이런 일을 한번 겪고 나면 마치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처럼 한동안 길거리에서 인사를 주고받을 때 머뭇거리게 된다. 그런데 사실 인사를 안 하고 안 받아줘서 타인에게 상처를 주고 관계의 앙금을 만드느니, 내가 좀 민망한 일이 가끔 벌어지더라도 열심히 인사하는 게 나한테도, 내 주변 사람에게도 도움이 되는 건 확실한 것 같다. 그러니 꿋꿋하게 나는 아파트에서도, 회사에서도 열심히 인사를 해야겠다. 뭐 닳는 거 아니잖아.
표제 사진 출처: pixabay.com/en/handshake-hand-give-business-man-2056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