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일간 서른 도시, 서유럽 대륙을 횡단한 두 남자의 여행기 #03
이른 아침부터 복잡한 인천국제공항 2터미널에 도착한 내가 가장 먼저 할 일은 체크인과 수화물 위탁이었다. 인천국제공항은 상당히 무인화가 잘 되어 있는 공항이기 때문에 체크인과 수화물 위탁도 셀프로 가능했다. 그래서인지 데스크를 찾는 사람들보다 무인기 앞의 인파가 더 많았다. 만약 데스크로 쫓아 갔더라면 더욱 현명했을지도 모르나, 남는 게 시간이었기에 난생 처음으로 셀프 체크인을 해보았다.
체크인 무인기는 여타 무인기들과 비슷해 보였다. 여권만 있으면 좌석까지 지정해서 티켓을 발권 받을 수 있었다. 그렇게 발권 받은 티켓이 있어야 셀프 수화물 위탁이 가능했다. 캐리어를 올바른 방향으로 수화하는 데까지 성공했으나, 바코드 스티커를 붙이는 과정에서 조금 버벅거렸다. 다행히도 인근에는 항공사 직원들이 돕고 있어 문제를 쉽게 해결할 수 있었다. 덕분에 모든 셀프 체크인 과정은 고작 30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탑승까지는 반나절이나 남았는데 말이다.
다음 목표는 환전이었다. 환전은 전날 은행 어플을 통해 미리 해 두었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지하 1층으로 내려갔다. 처음엔 은행 옆 ATM에서 돈을 찾으려 했으나, ATM은 유로화를 취급하지 않았다. 결국 창구 직원을 통해 돈을 찾았다. 당시 환율이 비쌌던 터라 돈을 많이 준비할 수는 없었다. 현금은 400유로만 환전했고, 나머지 비상금은 mastercard와 VISA 카드로 나누어 준비했다. 사실 준비했던 비용으로 턱없이 부족하다는 걸 알았지만, 가진 돈이 이게 전부였기에 조금씩 아껴 쓰자는 마음을 먹었다.
그렇게 절약하자는 마음을 굳게 먹는 것도 중요했지만, 고픈 배를 채워줄 아침밥을 먹는 것도 중요했다. 인천국제공항에 오면 꼭 먹어보고 싶은 게 있었다. 한때 SNS에서 소문났던 ‘쉐이크쉑’이었다. 지방에 입점하지 않은 브랜드였기에 이른 아침일지라도 먹어보고 싶었다. 나는 정석대로 쉑버거와 감자튀김, 밀크셰이크까지 주문하고 싶었다. 그러나 나의 소화기능은 나약하다는 점을 고려해야만 했다. 조금은 기름진 햄버거를 씻어내려 줄 레몬 에이드와 함께 쉑버거를 주문했다. 두 메뉴의 총 가격은 10,800원이었다. 내가 인천국제공항에서 처음으로 지불한 돈이자 마지막으로 사용한 돈이었다. 특히, 매장에서 자리를 잡은 김에 많은 시간을 때우기로 했다. 그렇게 혼자서 아침 식사만 1시간 30분을 먹어 보기로 했지만, 현실은 쉑버거를 진작 먹어 치우고 애꿎은 레몬 에이드만 모기처럼 빨아대고 있을 뿐이었다. 게다가 이른 아침 매장에는 매우 한산한 풍경을 보였다. 나와 같은 한국인은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였다. 오히려 외국인 손님들이 꽤 있는 편이었다. 내 앞에 앉아 있던 한 외국인은 쉑버거에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우리나라에서 이른 아침부터 맥주를 마신다는 건 매우 위화감이 느껴지는 풍경이지만, 한편으로 매우 힙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결국 매장에 앉아 있는 게 지겨웠던 나는 자리를 벅차고 일어났다. 차라리 면세점에서 사람 구경이라도 해보자는 심정이었다. 내게 짐은 고작 크로스로 맨 슬링백 하나와 뒤로 맨 백팩 하나뿐이었기에 가벼운 마음으로 출국장에 들어갔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인가? 검열과 수색 도중 내 가방에서 문제가 발생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문제될 만한 짐은 하나도 없었다. 그러나 나는 슬링백과 백팩을 모두 뒤집어 검사를 받아야만 했다. 그러던 중 백팩 앞 쪽에서 유리병이 하나 나왔다. 실로 어이가 없었다. 새벽에 방문한 대전 휴게소에서 샀던 음료수 병을 가방에 넣어두고 새까맣게 잊어버렸던 것이다. 이내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죄송하다 했고, 수색관은 다음부터 주의해달라는 말과 함께 유리병을 버려주었다. 나는 이렇게 사소한 사건을 겪은 후에 면세장으로 입장했다.
면세장은 각종 향수와 화장품 내음새로 가득 차 있었다. 흔히 아는 명품 매장들이 즐비해 있었지만 무시해야 했다. 아까도 말했지만, 유럽에 도착하는 순간부터 거지가 된다. 탑승 전부터 돈을 허투루 쓸 수 없었다. 실제로도 인천국제공항에서 지출한 돈은 쉐이크쉑에서 사용한 10,800원이 전부였다. 때문에 내가 가야할 곳은 딱 두 군데가 다였다. 231번 게이트와 268번 게이트였다. 마치 이름부터 <해리포터>에 나오는 ‘9와 3/4 승강장’과 같은 느낌이 들었다. 사실 두 게이트는 바로 인천국제공항에서 제공하는 무료 라운지가 있는 곳이다.
2터미널 무료 라운지에서는 다양한 서비스를 누릴 수 있다. 그 중 하나가 냅존이다. 냅존은 수면용 침대들이 배치되어 있는데, 나처럼 대기 시간이 긴 승객에게 안성맞춤인 공간이다. 침대 아래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인체공학적으로 생긴 매트 위에 몸을 뉘였다. 왜 진작 냅존으로 바로 오지 않았는지 후회할 정도로 몸과 마음이 편안한 곳이었다. 그렇다고 잠은 오지 않았다. 이미 버스에서 충분한 잠을 취했던 탓인지, 아니면 12시간 비행 내내 한 번 더 자야 한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는 탓인지 잠에 들지 못한 채 누워있었다. 몸은 아주 편했지만, 기다리는 시간은 심심하기 짝이 없었다.
그래서 회사에서 일하기 싫은 루팡 친구들을 찾아 카카오톡을 주고받았다. 나는 라운지 사진을 찍어 보낸 뒤, 그제서야 친구들에게 여행을 간다고 알렸다. 친구들은 흥분한 말투로 내게 따져 물었다. 유럽까지 가면서 말 한마디도 없이 떠난다고 서운함을 들어냈다. 나를 ‘배신자’라고 소리치면서도, 한편으론 여행 먼 길 조심해서 다녀오라고 응원해주었다. 그러다 비행기에 오르기 직전에 샤워를 하고 상쾌한 기분으로 탑승하고 싶었다. 마침 냅존 맞은 편에는 무료로 이용할 수 있는 샤워실이 마련되어 있었다. 수건도 무료로 제공됐고, 샤워실마다 탈의실이 따로 배치되어 있어 프라이빗함과 편리함이 동시에 느껴졌다. 사실 돈을 한 푼도 쓰지 않고 이렇게까지 서비스를 누릴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에 의외로 놀라는 중이었다. 역시 샤워 후에는 상쾌한 기분이 든다. 앞으로 12시간 비행을 쾌적하게 즐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냅존 옆 부스에는 릴렉스 존도 있었다. 테이블에 앉아 휴식을 취할 수 있었고, 테이블마다 콘센트를 사용할 수 있었다. 샤워 후 이륙시간까지 30분 밖에 남지 않아 이 곳에 잠시 머물기로 했다. 스마트폰을 충전하면서 유튜브를 시청했다. 게다가 탑승시간에 딱 맞춰서 가는 것도 별로였다. 어차피 비즈니스 석부터 탑승한 뒤, 다시 이코노미의 기나긴 줄을 기다릴 바에 천천히 가기로 했다. 마침 라운지에서 게이트까지는 멀지 않았다. 이륙시간 20분을 남겨두고 라운지에서 일어났다. 게이트에 도착하니 줄은 많이 줄어든 상황이었다. 그래서 전혀 기다림을 느끼지 않고 차분히 탑승할 수 있었다. 탑승교를 건너면서 머리 속으로 ‘기내에 짐을 정리하고 착석하면 5분 이내에 이륙하겠다’는 계산이 됐고, 드디어 바르셀로나 행 비행기에 탑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