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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입니다 May 18. 2022

공동체에서의 갈등

잠 못드는 밤



농장으로 가는 시골 버스 안에서

( 이 글이 누군가를 슬프게 하지 않길 바라며 )


코밑에 호흡의 드나듦을 알아차리는 사마타도 몇 시간, 몸의 아래서 머리끝까지 오르고 내리는 위빳사나도 한 차례. 이러나저러나 잠이 들지 못하던 나의 모습이 이상했다. 전에 있던 농장에서의 순간들, 내게 삿대질에 눈을 부라리던 그 친구의 모습이 아른아른 지나갔었다. ‘나는 그 순간에 무얼 말해야 했을까’라고 하며 한 마디 한 마디 제대로 내뱉지 못한 내 모습을 안타까워했다. 분노감과 우울감, 절망감에 젖어들었다.



나의 평판을 깎아내리고, 이런 말 저런 말 못 하게 만드는 그 둘을 보면서 숨이 막히고 괴로웠다. 눈물을 흘리며 한발 더 양보하며 내가 더 신경 써야 했다며 미안하다 어쩐다 하더라도 마치 처음부터 ‘널 우리 농장에서 나가게 만들 거야’라고 다짐이라도 한 듯 꿋꿋이 나를 공격하고 나로 인해 더는 이곳에 있을 수 없다고 약자인 양 부르르 떠는 모습들에 도저히 아무런 행동도 할 수 없더랬다.



지속 가능함을 고민하지 않는 사람들, 그러면서도 농장에 들어온 사람들. 퍼머컬처가 무엇인지, 왜 지속 가능함에 대해 고민해야 하는지 알지 못하는 사람들. 물론 그런 사람들을 데리고서도 함께 어떻게 하면 좋을지 고민하고 머리를 싸매는 모습들이 필요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지속 가능함을 생각하는 사람들과만 살아가는 세상은, 퍼머컬처나 자연농법을 하는 지구 농부들 사이에서도 나오는 비판적인 목소리다.



옳고 좋은 것은 안다. 하지만 그들은 그들만의 리그, 그들만의 세상을 꿈꾸며 작은 세상에 갇히고 만다.

그렇기에 나 역시도 충분히 그들이 함께 머물 수 있도록 충분히 애를 쓰고 더 관대하고 친절한 시선으로 돌봐줬어야 하지 않았나.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눈빛에서 나의 모습에서 뾰족한 모습들이 나왔었을까. 결국 지금 내가 겪는 고통이나 아픔들은 다 내가 뿌렸던 씨앗에서 돌아온 게 아닐까 생각한다. 카르마(Karma), 업을 믿는 나로서는 이렇게 밖에 받아들일 길이 없다. 그리고 뭔가 더 나아지려면 그 문제의 해답을 내 안에서 찾는 게 맞는다고 보기 때문이다.



물론 그런 사람들에게 나 역시 쉽게 친해질 수 없었노라고 시인할 수밖에 없다. 퍼머컬처(Permaculture)의 퍼머(Perma-)는 '영구적인, 지속적인'을 뜻하는 Permanent에서 왔다. 지속 가능하며 영구적인 시스템을 디자인하는 기법. 그런 퍼머컬처를 조금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왔을 때 과연 이 친구들이 이를 제대로 해낼 수 있을까. 함께 생활하면서도 이게 맞을까를 고민해왔던 나. 채소보다 고기반찬들이 올라오고, 먹다 버린 플라스틱 물병이 고스란히 여기저기에 굴러다니는 공간을 보며 나도 마음 여럿 썩혔더랬다. 하지만 명상을 하니 내 안에 피어나는 작은 불편함 들 하나하나, 못마땅함 들 하나하나를 다 알아차리고, ‘그래도 내가 더 도와주지, 내가 더 기다리지’라고 기다리기도 했더랬다. 그렇게 5개월가량을 기다려왔었다.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노력이자 나뿐만 아니라 모두와 함께 나아갈 수 있는 올바른 방법이라고 믿었으니까. 상대에게 다가가 꼬치꼬치 캐물으며 '아니 플라스틱 병을 이곳에 두는 게 맞아? 나 너무 속상한데?'라며 따지기도 벅찼다. '화가 난다', '짜증이 난다'라는 등 자기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다 뿜어대고, 상대와 싸우는 것조차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는 사람들하고 굳이 이런저런 말을 하는 것보다야 아예 조용히 내 안에서 그들의 행동에서 불편함을 느끼는 마음들을 차곡차곡 알아차리고 내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그 끄트머리들을 조금씩 조금씩 닳게 만드는 게 옳다고 여겼으니까. 나 한 사람의 인내심과 마음만 조금 다듬어주면 괜찮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만약 내가 그때마다 불편했던 감정들을 잘 설명하고, ‘아 내가 이런 점들이 조금 힘드네…’ 라고 표현했었더라면 어땠을까? 그랬더라면 이렇게 내가 분리되어 나오는 일까지는 없었을까? 알 수 없다. 그저 ‘그때의 나’는 ‘그때의 나’ 수준에서 최선을 다했을 뿐.



하지만 끝내가서는 플라스틱 일회용 물병을 마음껏 마셔대던 사람이 나에게 손가락질하고, 내가 마음고생했다며 토로하는 말들 하나하나에 공감은커녕 반박만 해대는 그 친구를 보며 내 안에 분노는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물론 플라스틱 물병을 늘상 쓰던 친구는 약숫물도 못마실 정도로 물에 예민한 친구이기도 했다. 필터링을 거치지 않은 일반 물을 마시고 병원에 실려간 적도 있다고 했으니. 다만 본인이 마신 물병, 플라스틱 빈 병을 이 곳 저 곳에 둔 모습들을 보였을 때 ‘그러지 말라’ 라고 한 마디 하지 않았던 내 자신이 안타깝기도 하다. 상대의 성격을 알기에 싸우고 지지고 복더라도 그 때에 얘기했더라면 이 사단까지 났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지금에서 이렇게 글을 쓰며 생각해 보니, 내 안에 갖고 있던 분노가 생각보다 훨씬 컸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감정을 갖고서는 평화로운 밤을 보낼 수 없었겠지.



사실상 그들은 내가 남아있길 바라지 않았던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렇기에 그들을 보고 있는 게 숨 막히고 너무 많은 화가 나고, 더구나 이런 나를


너는 여기 있으면서 기여한 게 없다.

라는 농장주의 말을 들으니, 그곳에 발을 붙여 서있고 싶은 마음이 아주 사라져버렸으니까. 2천만 원가량의 계약을 따오고, 6억 원의 지원 사업에서 서류 부분을 퇴고해 우리나라에서 가장 좋은 성적을 낸 지자체 사업에 기여했으나 기여한 게 없다는 말을 들으니. 크고 작은 콜라보를 만들고 수천수만 명의 인스타그램 유저들이 주목하도록 포스팅을 쌓아온 일들, 매 순간의 모습들을 사진사처럼 가까이에서 찍어 일일이 올려댔던 내가 이런 소리를 들으니 그곳에 더는 남아 있을 수 없었다. 물론 농장주도 홧김에 이야기했지 진심은 아닐 수 있으리라는 생각은 들지만, 어쭙잖은 추측을 하는 것도 우스운 일.



나도 바보처럼 우두커니 미안하다 어쩐다 하는 소리만 내는  아니라, ‘ 네가 그렇게 말하면  되지라며 소리치며 나도 나를 방어해 줬어야 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내가  스스로를 옹호하면서 남이 아플까  이런 소리 저런 소리를 못해 명상으로  마음을 다듬으려 하기 전에, 나를 사랑해야 했었을는지도 모른다. 되려 가서 소리를 치면서  안에 남아 있던 공격성을 보이면서라도  자신과 그들 사이의 균형을 잡아야 했는지도 모른다.


나는 나를 사랑하는 데에 아직도 서툴다. 남에게 이를 드러내 보이면서 '건들면 나도 너를 상처 입히겠어'라고 표현하는 데에는 서툴고 조심스럽다. 어쨌든 상처를 입히는 만큼 상처는 돌아올 테니까.



나의 인생을 굽이굽이 돌아보면 참 그러하다. 나를 사랑하는 일이라는 게 나도 모르게 놓치고 있을 때가 많으니까. 저번에 함께하던 파트너도 내 기다리고 그의 삶이 잘되기를 바라고 바라다 결국 나의 모든 것이 흔들리고 나서야 내려놓았으니까. 그게 나는 이 세상에 사랑을 표현하는 가장 올바른 방법이라고 생각하기도 했으니까.



사람의 마음을 무너뜨리고 그 상처를 벌리는 일들 그 일들이 아주 잠깐이지만 일어났었던 것 같다. 슬픔이 담긴 콘텐츠는 사람들의 반응이 적다는 통계가 있다. 이 글은 반응이 적게 나오려나? 어쨌든 이러저러 복잡한 마음들을 가만히 풀어나갈 수 있는 점들은 감사하다. 글을 쓰다 보면 명상보다 더 쉽게 더 많은 마음들이 끄집어 나오는 듯하다. 가만히 앉아 하는 명상으로는 내 안의 무수히 많은 마음들을 하나하나 길어올리기에 쉽지 않다. 물론 명상이 내가 더 날카롭게, 영민하게 '지금 이 순간'에 살 수 있게끔 도와주는 것은 사실이다. 그를 통해 세상을 바라보면서도 순간순간에 머물고 있는 세상의 '아름다움'. 내 마음에 '아름답다'라고 느껴지게끔 만드는 피사체를 놓치지 않게 만들어주거나, 신속한 의사결정을 하는 데 도움을 주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런 명상만으로도 다 알 수 없는 내 안의 불편함과 무의식들은 이렇게 글을 통해 하나하나 한 토씨 한 토씨 다시 복기해나가며 헤아리는 게 훨씬 더 바느질 한 땀 한 땀 해내듯 세밀하게 할 수 있는 듯하다.



이렇게 나의 마음이 길게 끄집어 나오는 것을 보면, 아직도 나는 과거에 사로잡혀있는 듯하다. 그래서 마음이 갑갑하기도 하다. 이제는 이 과거를 다 접어두고 앞날만을 보고 집중해야 할 텐데... 나의 마음은 아직도 과거에 머물러있구나. 이런 나를 조금은 더 안아주고 더 다독거려주고, '그럴 수 있었겠다. 그래 얼마나 속상했겠니, 얼마나 슬펐겠니' 하며 들여다봐줘야 할 일이다. 이 세상의 그 누구도 나를 들여다보지 않더라도, 나는 내 안을 들여다봐주고 토닥여줘야 내가 살아나아갈 수 있을 테니까. 그렇지 않는다면 내 마음에 곪아 터져버린 고름이 계속해서 흘러나와 더는 아물지 않은 상처처럼 나를 아프게 할 테니. 흘러나오는 고름들을 다 쥐어 짜내고 새살이 돋도록 계속해서 고름이 나올 때마다 깨끗이 닦아줘야겠다.


이렇게 써논 글들이 또 부메랑이 되어 그들이 내 멱살을 붙잡고 이것저것을 읊으며 욕할지도 모르겠다. 어려운 일들과 얽히고 섥힌 마음들을 애써 글에 풀어내려니 한 글자 한 글자가 어렵다. 하지만 이 또한 나의 삶이기에 담아본다. 잊혀지는 것보다 남기는게 더 낫겠다는 생각으로. 지금을 붙잡지 않으면 다 사라지고 말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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