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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험과 불안

by 산보행

시험의 종류


시험이란 지식, 기술, 능력 따위를 평가하고 검사하는 일을 의미한다. 서른 살이 되도록 나는 각종 시험들을 치뤄왔고, 지금도 시험을 치루는 중이다.


작게는 각 과목의 중간고사, 기말고사부터 크게는 수능, 취업, 법학적성시험, 변호사시험, 회사 인사평가에 이르기까지 각종 시험을 치뤄왔고 치룰 것이다. 여태까지 치뤄왔던 시험의 종류를 분류해보자면 크게 적성시험과 자격시험으로 분류할 수 있을 것 같다.


적성시험이란 대학수학능력시험, NCS, PSAT, 법학적성시험(LEET), 코딩테스트 등의 시험 등이 있다. 이는 주로 암기능력보다는 문해력, 수리능력, 추론능력 등의 사고력을 요구한다. 사고력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꽤나 추상적으로 느껴지는데, 시험들이 해가 지나고 분석되다보면 요구하는 사고력 역시 꽤나 체계적으로 정리되고, 그에 의해 출제된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다음으로 자격시험에는 변호사, 변리사, 회계사 등의 각종 자격사 시험과 컴퓨터활용능력, 정보처리기사, 한자자격증 등이 있다. 이러한 시험들은 주로 문해력, 수리능력, 추리능력 등의 사고력보다는 암기력을 요구한다. 혹자는 이러한 시험에도 논리력 등이 필요하다고 말할 수 있겠으나, 능력의 비중을 따지자면 암기력이 훨씬 더 많이 필요할 것이다.


한국에서의 시험


이러한 한국에서의 시험제도들은 과연 제도의 취지와 목적에 맞게 운영되고 있을까? 내가 느껴온 바로는 그렇지 않다. 학교에서의 내신이라 불리우는 초,중,고,대학을 통틀어 일부 과목을 제외하고는 학업성취도평가를 통해 상대평가로 이루어진다. 본인이 해당 과목의 시험범위를 아무리 숙달해도, 나보다 나은 이들이 있다면 낮은 등급의 내신을 받을 수밖에 없다. 이러한 문제는 출생률이 갈수록 줄어 반에 10명 남짓되는 요즘 학교들에서 더더욱 대두되는 문제이다.


가장 객관적이라고 평가받는 대학수학능력시험조차 대학에서의 학문을 배울 수 있는 능력을 시험하겠다며 대학정원을 정해두고 상대평가를 통해 수험생들을 시험한다. 많은 수험생들이 목표로 하는 인서울 대학의 정원은 7만명 정도이며, 2018년 기준 전체 수험생의 12프로, 2024년 기준 20프로 정도에 해당하는 숫자이다. 수험생 인원이 줄어 인서울 입학이 쉬워졌을거라 생각하면 오산이다. 수능이 객관적이라고 평가받는 이유는 큰 수의 법칙에 의해 다른 시험들에 비해 표본평균이 일정하게 맞추어지기 때문이다. 수험생 정원이 큰 폭으로 줄어들고 시험의 난이도가 갈수록 올라가는 요즘, 인서울 대학 입학 난이도가 옛날에 비해 쉬워졌다고 말할 수 있을까?


더불어, 대학입학 난이도가 실제로 쉬워졌다고하더라도 여전히 10명 중 2명만이 인서울 대학에 입학할 수 있다. 일부 인터넷 강사들의 말처럼 노오력만 하면 누구나 갈 수 있는 시험이란 말은 객관적으로 틀린 말이다. 물론 나조차도 노오력을 통해 수능 성적을 크게 올려본 경험이 있으나, 이 또한 개인적인 경험일 뿐이다. 그 시대의 학생들의 수준, 그때의 시험 난이도, 그때의 나의 가정환경과 지적능력 등 여러 운적인 조건이 맞물려 그런 현상이 벌어진 것이다. 나로 인해 누군가는 성적이 떨어진 것이고, 개인적인 경험을 보편적인 현상이라고 치부하기엔 수험생들의 객관적인 조건이 너무나도 안좋다. 10명 중 8명이 죽는 의자 뺏기 게임에서 살아남으라고 강요하는 꼴이다.


그래도 내신과 수능 등의 시험은 제한된 입학정원에 의한 상대평가라는 명분과 실질적 평가가 일치한다는 점에서 그나마 나은 시험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한국의 회계사, 변호사 등의 자격시험은 명분과 실질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상황이 더욱 안좋다.


미국의 AI-CPA와 로스쿨 제도를 표방하여 개편한 한국의 회계사 시험과 변호사 시험은 자격사시험답게 절대평가라는 명분을 취하고 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는 자격사 현업 협회들과 정부기관들의 협의를 통해, 마치 최저임금을 정하듯이 자격시험의 정원을 정해두고 상대평가를 실시한다. 제도권에서 아무리 선진국의 제도를 받아들이려해도 현직 자격사들의 벽을 뛰어넘지 못한 결과이다. 혹은, 그 제도권조차 자격사들에 의해 만들어졌기 때문에 발생한 결과이다.


변호사시험을 예로 들면, 제도적으로는 합격선이 있는 절대평가임을 규정하고, 변호사협회, 법무부, 법학전문대학원협회 간의 협의를 통해 1700명 내외의 그 해 합격인원을 따로 정한다. 그렇게 정해진 합격인원의 등수즈음하여 해당 등수의 점수를 합격선으로 정하면 그만인 것이다.


응시인원은 누적된 불합격인원으로 인하여 3400명 정도가 되고, 초시 합격인원은 1200명 정도이다. 매 기수 리트 응시자가 2만명 가까이 된다는 점, 매 기수 로스쿨의 정원이 2000명, 졸업생이 1700명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생각보다 낮은 인원이 변호사시험에 합격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심지어는 모든 로스쿨에서 졸업요건으로 6월, 8월, 10월의 변호사시험 모의고사 점수를 요구하여 일정 수준의 점수에 미치지 못할 경우 졸업조차 시키지 않고 있다. 모 로스쿨에서는 70명의 정원에서 30명 내외의 인원만이 졸업하는 상황이 반복되고 있다. 학교 입장에서는 응시자수 대비 변호사시험 합격률이 학교의 실적으로 평가되니 응시자수 자체를 줄이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모의고사 점수 또한 상대평가에 의한 표준점수로 산출된다는 점을 고려하면, 그야말로 현실판 오징어게임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외부의 시선으로는 타 시험 대비 높은 합격률인 50%의 시험이므로 비교적 난이도가 낮은 시험으로만 비춰질 뿐이다. 중요한 점은 로스쿨과 회계사시험의 제도 취지가 자격시험이며, 절대평가를 통해 평가한다는 규정과 달리 상대평가를 통해 선발한다는 점이다. 시험의 난이도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실제로 난이도가 낮지도 않다..). 누군가가 죽어야만 하는 게임이 아님에도 본래 취지와 달리 누군가는 죽고 있다는 것이다. 여론은 이를 당연시 여기며 방관한다.


학창시철의 내신부터, 수능, 취업, 자격시험 그리고 다시 취업에 이르기까지 한국은 크고 작은 현실판 오징어 게임이다. 한국은 이러한 게임에 반발하는 이들의 항변은 패배자의 변명으로 취급하고, 살아남은 생존자들의 성공일화만을 스포트라이트하고 게임 참가 티켓을 내민다.


실제로는 인서울 대학에 합격하지 못한 10명 중 8명도, 경제적 자산이 크지 않은 이들도, 삶이 지속되는 데에 크게 문제가 되지 않음을 그 누구도 말해주지 않는다. 부양가족이 없고, 건강한 신체와 정신만 있다면 경제적 자립을 이룰 수 있음을 그 어떤 이들도 비춰주지 않는다. 그렇기에 한국의 많은 청년들은 자신의 지적능력과 노력, 그리고 가장 중요한 운에 몸을 맡기고 자신들만의 게임에 뛰어든다.



수험생의 자세


그럼 이미 시험에 뛰어들게 된 수험생인 우리는 어떻게 해야할까? 오징어게임2의 성기훈처럼 게임 자체를 부수러 떠나야할까? 영화 속 성기훈은 이미 게임에 참여해놓고 모두를 살릴 수 있다며, 게임이 불합리하다며, 게임을 멈춰야한다고 외친다. 이러한 모습은 나와 같은 냉혹한 한국인들에게는 어딘가 답답하고 불편하게만 느껴진다. 누가 그 게임에 참가하라고 부추기기라도 했는가?


그렇다. 나는 영화 속 성기훈처럼, 변호사시험이라는 게임에 참여해놓고 게임이 부당하다며 외치고 있는 중이다. 성기훈이 답답하다며 꾸짖는 한국인들에게는, 나의 부모님, 나의 친한 친구들한테까지도 나는 징징거리는 1인에 불과한 것이다.


나 또한 그랬다. 막상 대입시험, 취업에 (나름) 성공하고 나서는, 생각보다 합리적인 게임이라고, 이정도는 통과해야 하지 않겠냐고 생각했다. 지능과 노력, 시대적 배경, 경제적 형편, 신체적, 정신적 건강 등 모든 것이 운에 불과함에도, 주변인들에게 그 정도 게임은 충분히 통과할 수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10명 중 8명의 의자 정도는 충분히 빼앗을 수 있지 않겠냐고..


그래서 이미 게임에 뛰어들은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한다는 말인가?




안나카레리나의 법칙

- 행복한 가정은 모두 서로 엇비슷하고, 불행한 가정은 각기 달리 불행하다.


수험생 또한 마찬가지이다. 각종 시험에 뛰어들어 실패하는 이유는 각기 다양하다. 게임, 잠, 도박, 드라마, 건강이상 등등 이외 잡다한 공부 외의 자의적, 타의적 요소에 의해 시험에 실패하는 모습을 떠올릴 수 있다.


그러나, 누구든 시험에 성공하는 수험생의 모습을 떠올리라하면 모두 엇비슷한 모습을 떠올릴 것이다. 아침7시에 일어나 12시에 잠을 자는 삶. 공부, 밥, 운동 외에 그 어느 것 하나 눈돌리지 않는 삶. 정답은 누구나 알고 있다. 실천이 어려울 뿐.


그렇다. 게임에 참가했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이겨야 한다. 적어도 한국에서의 시험은 그런 시험들이다. 학창시절부터 시작하여 어찌보면 죽을 때까지 그런 게임의 연속이다.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정답 그대로 실천하여, 제한된 개수의 의자를 남으로부터 빼앗아 나의 자리로 만들어야 한다.


이렇게 징징거리고만 있을 수 없다. 한국에서의 시험이 불합리하다고, 이러면 안되지 않냐고 외쳐보아도 타인, 주변인, 그리고 나 자신까지 그 누구도 들어주지 않는다.


이후의 삶은 모르겠다. 일단 '그냥' 해야할 것을, 해야만 하는 것을 한다.


달고나 뽑기부터 구슬치기, 의자 빼앗기, 유리다리 넘기, 가위바위보 하나빼기 등등등...

내신, 수능, 학점, NCS, PSAT, 코딩테스트, 면접, LEET, 토익, 변호사시험, 실무수습, 인사평가 등등등...




2022수능 국어 브레턴우즈체제 지문의 보기박스 문제에서 '환율이 오르면, 수입품의 가격이 상승하여 수입품의 수요가 줄고, 수출품의 가격이 상대적으로 하락하며 이에 따라 상대국의 당해 국가에 대한 수출품 수요증가가 수출 증가로 이어지고 경상수지가 이내 개선될 것‘이라는 사실을 배경지식으로 미리 알고 있어야 풀 수 있지 않냐고 따지지 마라.


연예인과 광고사 간의 계약관계에서 고 최진실 배우의 가정폭력 피해 고백이 왜 품위유지위반에 해당하며 계약상 채무불이행에 해당하는지 묻지 마라. 그렇게 패소한 최진실씨는 각종 송사에 휘말리다 작고하셨다는 사실은 잊어라. 그 판례(2006고합177)로 인해 수 많은 연예인들이 위약금과 손해배상 소송에서 패소하게 되었고, 최근까지도 고 김새론 배우 역시 그렇게 생활고에 시달리게 되었다는 사실 또한 잊어라.


헌법재판소의 명확성원칙 판례와 관련하여

명확성원칙 위반 O

-'선거운동을 금지하는 언론인'

-'저속'

-'공공의 안녕질서 또는 미풍양속을 해하는 행위'

-'그 밖의 정치단체'

명확성원칙 위반 X

- ‘선거운동'

- '음란'

- '선거운동의 기획에 관여 또는 참여하는 행위'

- '품위를 손상하거나 위신을 실추시킨 행위'


기준과 이유에 대해 생각하지 마라. 그냥 외워라. 이건 시험에 나온다.



'왜?'라는 질문을 지우고 머리를 비워라. 외워야 할 지식으로 가득 채우고, 풀어야 할 문제들로 잔뜩 집어넣어라.


'그냥' 해라. 게임에 참가한 이상 무슨 이유가 필요하겠는가.


있는 힘껏 딱지를 치고, 비석을 던져라.

가능한 즐겁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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