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그림 같은 도시, 시에나

Siena_중세 골목, 시에나 대성당, 캄포 광장

by sandew

중세 도시, 시에나

한 시간 남짓 거리의 남의 나라

시에나는 피렌체에서 남쪽으로 차로 1시간 정도 떨어진 대표적인 중세도시이다.

시에나에 대해서는 약간의 역사적 지식이 필요한데 다시 말하지만 이탈리아는 오래도록 통일된 국가가 아니었기 때문에 지리적으로 이웃한 도시들일지라도 흥망 성쇠의 배경과 역사가 다르고 때문에 각각의 개성도 뚜렷하다.


시에나는 12-14세기, 중세의 순례길이 유행했던 시절에 중간 거점 도시로 크게 번성했다. 한창 잘 나갈 때는 이웃인 피렌체와 경쟁하던 구도였지만 흑사병이라는 재앙을 맞아 인구가 급감하고 정치적, 경제적 활로를 찾지 못한 채 그대로 쇠락했고 이웃인 피렌체가 메디치 가문의 주도로 르네상스로 나아간 반면 시에나는 고립된 내륙 도시라는 지리적 한계에 갇혀 버렸다. 하지만 덕분에 지금 이렇게 아름다운 중세의 유적을 보존하게 되었으니 알다가도 모르겠고 모르겠다가도 알겠는 인생사.




이탈리아의 도시 간 여행은 주로 기차를 이용하지만 피렌체발 시에나 편은 도심에서 타고 중심부에 도착하는 버스가 낫다기에 버스로 이동하기로 했다. 원래 시에나는 르네상스 도시도 아니고 피렌체에도 못 가본 곳이 아직 많은데 굳이? 싶어 방문 계획이 없었다. 하지만 평면적이고 밋밋해 덜 매력적이라고 느꼈던 중세 그림을 우피치에서 만났을 때 경건함이 주는 무게감에 매료된 것처럼 그동안 크게 관심을 갖지 않았던 중세의 도시에 대한 호기심으로 급조된 당일치기.

지친아침.png 너를 곳이 마땅찮아 가로지른 기둥에 대충 걸린 빨래와 피곤 쩔은 딸램의 라면 아침

밀린 빨래를 널고 밤새 모기와의 전쟁으로 2시나 되어 잠이 들었다. 피로가 쌓일 즈음이다. 아침부터 몸이 무거워 일어난 자리 그대로 컵라면을 먹고 나갔다. 버스 시간까지는 조금 여유가 있었지만 이번 여행에서 종종 있었던 ‘잘못 찾은 덕분'에 후다닥 뛰어 겨우 버스를 타고 그대로 꿀잠.... 아름다운 토스카나의 풍경을 눈에 가득 감고 싶었던 꿈은 꿈나라로 가고 일어나 보니 이미 눈앞에는 중세의 골목이 펼쳐지고 있었다.


골목.png 굽이 굽이 붉은 골목들

시에나는 ‘언덕 위의 붉은 도시’라고 불린다 붉은 벽돌로 지어진 건물 덕에 붙은 이 별명은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면 역사를 몰라도 아는 'Siena라는 이름'이다. 붉은 끼가 도는 밝은 갈색의 시에나는 언더페인팅(물감으로 그리는 밑그림)에 가장 많이 쓰는 색깔이기 때문이다. 한여름의 태양빛에 빛나는 시에나는 붉은 벽돌색보다는 살짝 바랜듯한 노란끼가 도는 오렌지에 가까웠다. 딸램은 산호색이라고 했다. 언덕 위의 벽돌집이 바다의 빛을 띠다니… 편견 없는 고딩의 표현이 좋았다.

시에나의 골목길은 언덕의 도시답게 경사가 가파르고 좁고 꺾인 길도 많아서 숨바꼭질을 하는 거 같다. 로마나 피렌체보다 집들도 작아 뵈고 골목도 좁고 문도 작고 오래됐지만 깨끗하고 조용하고 고즈넉한 느낌이 좋다. 골목 끝에 시에나 대성당을 만났지만 날이 더 더워지기 전에 이 아기자기한듯하면서 다이내믹한 골목을 좀 더 걷기로 했다.


반고흐의 그림이 떠오르는 노란 차양의 카페

카페 밖에 사람들이 앉아 있는 풍경도 지나온 도시들과 비슷하지만 소란스럽거나 번잡하지 않은 길가의 노란 차양이 드리워진 카페에 갔다.


야박한 인심에 물도 주문하고 맥주도 시켰지만 너무 작고 안 시원해서 배는 고픈데 입맛이 없다. 보기에도 이쁘고 맛도 훌륭했지만 둘이서 하나면 충분했던 파스타와 샐러드로 끝.



배 채웠으니 다시 돌아가 시에나 대성당.

꼴랑 피렌체 며칠 봤다고 자~꾸 시에나에 와서 중세가 소박하고 단조롭다 머 이런 얘기하게 되는데 중세의 성당은 결코 절대절대 수수하지 않다. 지금은 피렌체 일정에 따라 넣고 빼고 하게 되는 도시(중세 매니아가 아니라면)가 되었지만 한때는 오가는 순례객들에게 ‘우리 도시가 이 정도야’를 뽐낼 수 있는 성당을 짓는데 누구보다 야심만만했던 도시였다.

대성당의 흰검 외부와 내부

시에나 대성당은 특유의 흰검 줄무늬로 유명하다. 사실 피렌체 두오모에서도 같은 느낌이었는데 고급진 단색 다 냅두고 왜 굳이 얼룩말처럼 줄무늬를 도입했을까 라는 의구심이 있었다. 단언컨대 그건 줄무늬의 호화로움을 사진이 담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심지어 내부의 줄무늬 향연은 화려한 장식 꽤 보고 온 나에게도 어지러울 정도로 아름다웠다. 나름 열심히 각도, 색감 고려해 사진을 찍었지만 그 어떤 사진도 그 느낌을 담지 못했다. 다만 별 하나 반복으로 천상을 구현한 돔 장식으로 그 느낌을 대신할 수 있을 거 같다.



시에나의 꽃, 캄포 광장[정확한 이름은 ‘Piazza(광장) del Campo(들판:라틴어 campus에서 시작)’]

로마의 숙소 옆 광장 캄포 델 피오레를 우리끼리 캄포라고 불렀다. 어원 자체가 광장의 의미를 가졌기에 이탈리아 광장에는 캄포가 붙은 이름이 꽤 많다. 그러다 보니 이 캄포가 그 캄포인가 헷갈리기 쉽지만 캄포라면 시에나의 캄포를 말하는 것이라고 여겨도 무방하다 싶을 정도로 시에나의 캄포는 대표적인 광장이다.

왜?

지금껏 광장 좀 보고 온 사람으로서 왜인 거 같아?

몰라, 일단 엄청 크고…. 이쁜 거 같아.

ㅎㅎㅎ응 큰 광장이야. 많은 사람들이 자유롭게 모이고 소통하고 교류가 이루어지는 곳. 제 아무리 아름답게 만들어도 아무도 찾지 않으면 광장이 아닌 그냥 빈 터인 거지. 캄포의 근대사적 의미를 설명하지 않더라도 9개의 구획이 경사진 아래쪽으로 모이며 조개처럼 특이한 형상을 띄는 형태만으로도 아름다워서 잠시 앉아 있기로 했다. 이 넓은 공간이 사람들로 가득 찬 모습을 상상만 해도 엄청난 활기가 느껴진다.


중세는 뭐랄까.. 종교에 갇혀 있던 갑갑한 느낌이었는데 여기서 만난 중세 도시는 여백이 있는 스케치북 같아. 르네상스의 건축과 예술품들은 너무 완벽해서 너희는 그저 감탄만 하면 되라는 다소 일방적인 느낌이었다면 중세는 시에나 물감으로 그린 밑그림처럼 무언가 더 그리고 싶고 숨은 이야기가 있을 것만 같아.


카메라에 담긴 캄포는 넓고 수평적이지만 눈으로 보는 캄포는 조개의 가운데 공간이 훨씬 크고 깊다. 그래서 넓게 펼쳐진 공터라기보다 입체적이고 역동적인 생명체 같아 이 장면을 남기기로 했다.

IMG_8762.HEIC

그림은 눈에 비친 공간을 캔버스에 구현하는 과정이다. 그렇게 구현된 공간은 내 것이 된다. 산호색의 도시에서 바다처럼 넓은 공간에 앉아 하늘과 맞닿은 캄포가 우리의 장소가 되었다. 마치 여기에 우리 둘 뿐인 것처럼.



딸아,

우리가 고대 로마에서 르네상스를 거쳐 중세로 돌아왔는데 각 도시의 느낌이 어때?

응 내가 보기엔 완전 오래된 거, 그냥 오래된 거, 조금 더 오래된 거?

조금 더 오래된 곳에서의 젤라또는 산호색의 스뜨로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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