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andew Nov 08. 2020

아바이의 눈물

언젠가 그리워할 지금 그리운 아빠

주말 저녁은 항상 부산하다. 늘 쫓기듯 빨리 먹고 치워야 하는 주중과 달리 여유가 있어서일까 흥분해 들썩이는 엉덩이를 주체하지 못하는 아이들을 끌어다 앉히고 먹이고 윽박지르느라 넉다운이 되어갈 즈음, 좀처럼 연락이 오지 않는 한국의 아침 시간에 동생으로부터 톡이 왔다.


“고모부 돌아가셨대.”


순간, 가슴에 퍽하고 무언가 꽂히는 느낌은 고모부에 대한 기억이 아니라 아빠의 눈물이었다. 우리 아바이는 42년생, 함경남도 흥남 출생이다. 황정민 주연의 천만 영화 “국제 시장”에 나온 유명한 첫 장면, “흥남 철수”때 그 배들 중 하나에 실려 부산 국제시장이 아닌 경남 거제도에 정착했다.


이북에서 내려올 때의 상황은 어린 시절 식탁에서의 단골 소재였지만 그때는 관심도 없었고 의미도 몰라서 아바이의 전쟁통 고생담은 들은 횟수에 비해 제대로 아는 게 없긴 하다. 어쨌거나 그때 아바이 가족은 부모님인 나의 할머니, 할아버지, 누나인 큰 고모, 여동생인 작은 고모 이렇게 다섯으로 그 시절 흔했던 대가족에 비하면 단촐한 편이지만 실향민들의 가족 사랑은 정말 유별하다. 사실 무뚝뚝하고 거칠기 짝이 없는 할머니와 모이면 다투고 큰 소리가 나는 고모와 아빠를 보면서 한 번도 아빠의 친가가 화목하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다. 그러나 가족들끼리 똘똘 뭉치고 친하게 지내는 것과는 별개로 피난 나와 낯선 땅에서 소위 개고생을 하며 살아낸 세월을 겪으며 쌓인 가족에 대한 끈끈함은 내가 감히 이해할 수 없는 그 너머의 것이라 어림잡을 뿐이었다. 


그 삶이 말해주듯 아바이는 원래 무뚝뚝한 성격은 아니지만 거칠고 불같은 성정에 말도 못 할 구두쇠인 그저 어렵고 먼 아빠였다. 삼 남매 중 가장 아빠를 많이 닮은 둘째이자 맏딸인 나는 남매중 중 아빠의 각별한 사랑을 받아서였는지 유학 시절엔 아빠와 편지를 주고받을 정도로 애틋했던 적도 분명 있긴 했지만 이제 먹고 살만해졌는데 왜 아빠는 여전히 저렇게 거칠고 힘들고 궁상맞게 살아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어려서는 몰 몰랐고 커서는 부딪혔고 점점 아빠와의 직접적인 접촉을 피하게 되면서 아빠의 존재를 외면해왔다. 철이 늦게 들었다고 말하기엔 참으로 부끄럽게도 나는 정말 돼먹지 않은 딸이었고 그럼에도 아빠와 관계가 끊어지지 않았던 건, 미숙하고 서툴지만 일방적인 인내와 기다림이었던 아빠의 일방적인 부모 된 사랑 때문이었다고 확신한다. 


그 돼먹지 않은 딸 시절, 내가 목격한 아빠의 첫 번째 눈물은 대학 졸업하고 막 취직해서 얼마 지나지 않아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였다. 어려서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혼자 지내시다가 처음 얼마간은 주말마다, 그러다가 아주 같이 살게 된 할머니를 난 좋아하지 않았다. 할머니와 엄마의 고부갈등은 엄마와 아빠의 부부싸움으로 이어졌고 그럴 때마다 엄마와 아이들인 우리보다 아닌 당신 가족(할머니와 고모들)을 감싸안는 아빠를 볼때면 다큰 아들 치마폭에 싸고 놓지 못하는 엄마처럼 아빠 뒤로 숨어버리는 할머니가 미웠다. 위태위태한 집안 분위기가 싫었고 도망치듯 유학을 떠나 돌아왔을 때, 할머니는 치매를 앓고 계셨다. 내 기억 속의 정정하고 성정이 불같았던 할머니가 대소변조차 가리지 못하는 모습을 보며 노쇠한 할머니에 대한 안쓰러움 보다는 몇 년간의 치매 수발로 몸도 아픔도 피폐해진 엄마가 안쓰러웠고 그 희생을 당연히 감내해야 할 몫이라 여기는 아빠가 원망스러웠다.


할머니의 상태가 악화되어 입원하셨을 때, 난 사실 아무 생각 없었다. 침울한 집안 분위기 싫어 빨리 출근하고 싶었고 사회 초년생이라 아무것도 몰라 눈치만 보던 나에게 돌아가실 거 같다며 빨리 퇴근해라, 와서 대기해라 연락이 오는 것도 달갑지 않았다. 그랬던 어느 날, 정말 가실 거 같다며 연락이 왔다. 중환자실에 계셔서 면회가 안되다가 마지막 순간이라 허락되었던 것이었는지 너무 오랜만에 할머니를 마주했는데 핏기 하나 없는 허연 얼굴이 반쪽 된 모습으로 누워 계셨다. 생애 첫 임종을 마주한 나의 느낌은 슬픔과 애통함이라기보다는 너무 충격적이었고 솔직히 무서웠다. 그렇게 할머니는 돌아가셨고 잠시 침묵이 흐른 후, ‘악’ 하는 외마디 비명과 함께 아빠가 얼굴을 감싸 쥐고 흐느끼기 시작했다. 그땐 그 ‘악’ 소리의 의미를 알지 못했다. 이제와 보니 가슴이 쌓인 무거운 슬픔을 한꺼번에 토해내는 처음이자 마지막 아빠의 감정 표현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 전에도 그 이후로도 난 단 한번도 아빠의 눈물을 보지 못했다.


언제나 크고 강했던 아빠의 한없이 들썩이는 어깨를 보면서 어찌할 바 몰랐던 스물다섯 살의 나는 이후 결혼을 하고 엄마가 되었다. 어느 집에나 하나씩 있는 싸가지 없는 딸이어서 언제나 문제를 일으켰던 작은 고모는 아빠랑 일치감치 연을 끊은데 이어 할머니가 돌아가시자 언니인 큰 고모와도 연을 끊었다. 그 결과, 일가친척 다 털어봐야 고모 둘 뿐이었던 우리 가족에게 큰 고모네는 명절에 만나는 유일한 친척이 되었다. 큰고모는 아빠의 누나이자 정신적 엄마 같은 존재였다. 우리가 마뜩잖을 때마다 반복되는 레퍼토리, “고모는 니 나이 때 밥을 했고 아빠를 업어 키웠다.”는 신화의 주인공이었던 내 기억 속의 고모는 푸근하고 넉넉했다. 그리고 지금으로부터 10여 년 전, 그 고모가 위암 선고를 받으셨다. 칠순이 되기 전이니 젊은 나이셨다고는 할 수 없지만 평소에 워낙 건강하셔서 투병으로 인해 쇠약해지실까 염려가 되었지만 결국은 이겨내실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선고를 받고 채 3개월이 못되어 갑작스럽게 가셨다.


소식을 듣고 한달음에 달려갔을 때, 난 슬펐다. 엄마를 잃은 마음은 어린 아이나 어른이 되고 부모가 되어도 같은 슬픔의 무게인 듯 이미 중년이 된 언니 오빠들이 빈 마음을 안고 슬퍼하는 모습이 아팠고 소식을 듣고도 사느라 바쁘다는 핑계로 무심히 지나 보낸 세월이 아팠다. 하지만 그때 사실상 하나뿐인 누이의 죽음 앞에 마음이 무너졌을 나의 아바이는 참 차분했고 별다른 감정을 보이지 않았다. 난 현장에 있지 않아 나중에 들었지만 싸가지 작은 고모가 소식을 접하고 와서 깽판을 쳤을 때에도 평소 불같은 성질의 아빠는 본인 언니의 장례식장에서 쌍스런 언행을 퍼붓는 동생과 조카들을 누구보다 차분하게 타일러 보냈다. 아마도 그 차분함 속에 억누른 슬픔이 가신 누이에 대한 아바이의 인사였던 거 같다. 


우리 누구도 그때 이미 팔순 즈음이었던 고모부가 혼자서 남은 세월을 오래 버텨내시시라 생각지 않았다. 그러나 걱정과 달리 고모부는 의외로 잘 견뎌내셨고 건재하셨다. 일 년에 한두 번 명절의 모임은 자녀들의 부재로 점차 뜸해졌지만 고모부는 아빠의 남아있는 유일한 (의지할 수 있는) 가족이라는 걸 우리 모두 알고 있었기에 그 세월이 조금 더디 가기를 바랄 뿐이었다. 



우리 아바이는 이제 내년 팔순을 앞두고 계신다. 온 세상 부귀영화도 어찌할 수 없었던 이건희 회장님도 결국 가셨고 국민 아버지였던 송재호 배우님도 어제 별세하셨다. 아흔은 족히 되셨을 고모부를 보내는 일은 전혀 예측 못할 일도, 놀라운 일도, 심지어 이미 가셨어도 의외가 아니건만, 난 오늘 많이 울었다.


그 강한 마음이 아이같이 무너졌을 나의 아빠. 아빠가 가고 엄마가 가고 누나가 가고 유일하게 남은 형님, 더럽게 안 맞고 고집불통이라 만날 때마다 언쟁이 벌어졌지만 이제는 해마다 만나는 명절에도 서로의 귀가 들리지도 않아 본인 얘기만 하고 그마저도 이제 그만 만나야겠다 하면서도 놓지 못했던 그 매형의 죽음을 맞닥뜨린 팔순의 아바이.


전화기 너머 아바이의 목소리는 고모가 돌아가셨을 때처럼 차분했다. 그저 담담히 장례식장으로 가는 중이라며 상황을 설명하고 끊으셨다. 그리고 그곳에서 아바이는 많이 우셨다고 한다.

아마도 나의 아바이는 이제 본인 가족 (엄마와 우리들)을 앞세우는 '불행'이 아니라면 삶의 이치이니 받아들여야만 하는 '순리' 앞에 그토록 울며 슬퍼할 대상이 없을 것이다. 그리고 아바이가 슬퍼할 일이 없다는 말은 곧, 우리가 아바이로 인해 슬퍼할 일만 남았다는 사실이기도 하다.


흘러가는 세월을 누가 붙잡을 수 있으랴. 남아 있을 사람을 위해, 언젠가 떠날 사람을 위해, 그저 함께 하는 시간 더 많이 안아드리지 못함이 못내 아쉬운, 타국 살이하는 자식은 부모에겐 어쩔 수 없는 불효자다. 아빠가 보고 싶었다. 힘내시라고 아직 건강하시니 좋은 시절 많이 누리자고 말하고 싶었다. 


내일은 아빠한테 톡 대신 전화를 해야겠다. 아빠 목소리가 듣고 싶은 오늘, 마흔두 살의 딸.

작가의 이전글 줌마의 눈물은 아프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