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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andew Mar 21. 2022

겨울 바다로 가쟈

일곱 번째 파도를 기다려

겨울 바다로 가자. 메워진 가슴을 열어보자.

스치는 바람 불면 너의 슬픔 같이 하자.

너에게 있던 모든 괴로움들은

파도에 던져버려 잊어버리고

허탈한 마음으로 하늘을 보라

너무나 아름다운 곳을.


- 겨울 바다 중, (푸른 하늘 1집, 1988)


바다가 보이는 집에 살고 싶던 적이 있었다.

끊임없이 밀려오고 밀려나가는 파도를 보고 있으면 종일 앉아 있어도 하나도 지루하지가 않다.

해변을 집어삼킬 듯 맹렬한 기세로 달려들던 파도가 어느 순간 힘없이 부서져 모래사장 끝에도 미치지 못하고 사그라 들기도 하고

여느 다른 파도처럼 잔잔하게 다가오는 듯했다가도 갑자기 묵직하게 밀어붙이더니 마지막에 토해내는 한숨 같은 물결이 순식간에 밭 밑으로 치고 오르면, 나도 모르게 질겁해 '움메메~~' 겅중겅중 뒷걸음질을 치게도 한다.

큰 파도 뒤에 이은 더 큰 파도는 밀려오는 기세만 봐도 기가 질려 해안을 치고 올라오고도 남을 것 같지만,

이미 산산이 부서진 이전의 파도가 밀려 나가는 남은 힘에 삼켜져 언제 그랬냐 싶게 초라하게 흩어진다.

속초 해수욕장, 2022. 03. 20.


서울서 나고 자란 나에게 바다는,

어린 시절 부산 해운대 바다의 휴가철 북적북적한 인파들 가운데 미아보호소에서 울고 있던 동생의 모습이었다.

물과 하늘과 모레보다 사람과 소리의 기억으로 남아 있는 해마다 뉴스에서 보는 모습 말이다.

보스턴에서 대학을 다닐 때 우연히 이른 아침 바닷가를 찾았다.

적막하기 이를 데 없는 쓸쓸하고 청량한 기운이 감도는 차가운 느낌.

그 가운데 새, 파도, 하늘, 바람, 모레, 발끝에 닿는 까슬한 조개껍데기 느낌까지 온몸의 촉각이 섬세하는 반응하는 복합적인 감정이 만난 곳이었다.


그 새로운 모습이…좋았다.

어려서부터 알고 지낸 남사친이 어느날! 수컷 냄새 물씬한 남자로 다가온 것처럼,

(취향이 칼같이 단호해서 본인은 그런 적이 없습니다만, 이런 느낌이지 않을까 상상해 봅니다)

그렇게 어느 날, 낯설지만 익숙한 바다가 익숙하지만 낯선 느낌으로 내 맘에 들어왔다.


꽃피는 춘삼월

삭막한 아파트 단지 안에 봄이 왔다.

새싹이 나오려는지 앙상하던 나뭇가지 끝에 삐죽삐죽 돌기가 돋고

노란 콩고물 같은 산수유가 살포시 앉은 지난 주말,


"애갸, 우리 봄바다 보러 가자"

막둥이를 꼬셔 강원도 속초로 향했다.

‘이번 주말엔 못 가요. 막둥이랑 속초 가따오려고’라는 문자에 아바이 왈,

‘거기 어제도 눈이 많이 왔고 이번 주말도 폭설이라니 조심하는 게 좋겠네’

으잉? 나만 날씨 안 보고 살았나, ‘한국은 역시 봄이 빨리 와’ 하면서 신나게 예약했는데 진눈깨비 좀 날리다 말겠지 하고 룰루랄라 출발했건만

우리를 기다리는 건 해마다 토할 정도로 보고도 남았던 폭설, 폭설, 폭설,,,

심지어 지난 겨울 나왔을 때 너무 준비 없이 와서 이번엔 스노우팬츠, 장갑, 부츠 다 챙겨 왔건만 너무 일찍 찾아온 봄에 괜히 가져왔다며 툴툴거리며 죄다 집에 두고 왔는데…


길고 짧은 터널들이 이어지는 서울양양 고속도로.

땅에 닿는 순간 질척거리며 녹아버리는 진눈깨비로 시작한 눈송이가 점점 굵어지더니

터널 하나 나올 때마다 수북수북…

점점 앞유리가 얼어붙기 시작하면서 닦아내는 와이퍼가 뻑뻑해지는 진짜 겨울 여행이 되었다.




다음날, 만개한 봄꽃 대신 하얗게 눈꽃이 핀 속초 바닷가에서 눈을 떴다.

어제 종일 몰아친 눈보라가 무색할 만큼 쨍한 해가 떴는데

전날의 여운이 남은 듯 바다는 여전히 남은 숨을 거칠게 내뱉고 있다.


그 바다를 보며 20대 청춘의 바다를 떠올린다.

한없이 도전하고 싶고 무너지고 넘어져도 또 달릴 수 있을 것 같던 거칠지만 강인했던 그 바다가,

촤아~~~낱낱이 흩어지며 밀려나가는 모습이 마치 일어서려다 다시 무너지는 나를 보는 것 같아 안쓰러웠다.

꺄악!!

막둥이가 소리를 지른다.

순식간에 들이닥친 파도에 여기까진 안 오네 까불던 막둥이 다리 홀랑 빠지고 신발이 다 젖어버린 게 아닌가.

"으앙~~~ 엄마, 너무 차가워"라는 말에,

평소 같으면, "에그… 그러게 조심하라니까! 이 젖은 거 다 어쩔 거야!" 짜증을 냈을까?’

푸식~

웃음이 난다.

"애기 다 젖었네, 차에 가서 말릴까? 아님 우리 아예 신발 벗고 놀까?!!!"


평소와 낯선 모습의 엄마에게 막둥이 현타가 왔는지??

"아니, 차에 갈래, 추워."


그래,

파도는 또 올 거니까,

담에 놀지 머.



'일곱 번째 파도'라는 소설을 읽은 적이 있다.(https://book.interpark.com/product/BookDisplay.do?_method=detail&sc.prdNo=203569493)

일곱 번째 파도는 예측할 수 없어요. 오랫동안 눈에 띄지 않게 단조로운 도움닫기를 함께 하면서 앞선 파도들에 자신을 맞추지요. 하지만 때로는 갑자기 밀려오기도 해요. 일곱 번째 파도는 거리낌 없이, 천진하게, 반란을 일으키듯, 모든 것을 씻어내고 새로 만들어 놓아요. 일곱 번째 파도 사전에 '예전'이란 없어요.'지금'만 있을 뿐. 그리고 그 뒤에는 모든 게 달라져요.
더 좋아질까요, 나빠질까요? 그건 그 파도에 휩쓸리는 사람, 그 파도에 온전히 몸을 맡길 용기를 가진 사람만이 판단할 수 있겠지요.

누군가는 파도에 삼켜져 허우적거리고

누군가는 파도의 끝을 잡고 올라타 질주하기도 한다.

인생이 실패했다고 느껴지는 순간,

일상의 모든 순간들에서 마주하는 절망과 쓸쓸함, 무기력함, 그 모든 것을 부서지는 파도에 흩어버리고

그 끝을 잡고 일어서고자 하는...

겨울 바다는 나에게 간절함이다.


 간절함으로 나는 지금 영원히 올지 안올지 모르는 일곱번째 파도를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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