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에 기록적인 폭설이 내렸다. 보통은 아무리 많이 내려도 다음 날 낮이면 대부분 녹아버렸는데, 이번에는 달랐다. 영하의 날씨가 며칠을 지속되니 여기도 북극발 한파를 피해 갈 수 없구나, 생각했다. 일기예보를 보아도 영하의 날씨이니 눈은 녹지 않고 쌓였으며, 며칠간 하얀 세상을 보며 지냈다. 사실상 고립이 된 것이나 마찬가지였지만 지내는 데에 딱히 어려울 것은 없었다. 냉장고 파먹기도 하고 밀린 책과 드라마도 보면서 고요한 시간을 보냈다. 그냥 그 시간이 좋았다.
비도 그렇고 눈도 그렇고, 그냥 바라만 보아도 마음이 편안해진다. 모든 걸 다 포용하고 이해해 주는 느낌이랄까. 내 마음도 그 눈발 속에 파묻혀 지금 하는 고민은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생각이 든다. 날 선 마음도 뭉툭해져서 다 괜찮다고 속삭여주는 듯한 느낌이다. 이쯤 해서 떠오르는 시 한 편, 서정주의 「내리는 눈발속에서는」을 떠올려보고 이야기를 이어가야겠다.
내리는 눈발속에서는
서정주
괜,찬,타,…
괜,찬,타,…
괜,찬,타,…
괜,찬,타,…
수부룩이 내려오는 눈발속에서는
까투리 매추래기 새끼들도 깃들이어 오는 소리 …
괜찬타,…괜찬타,…괜찬타…괜찬타,…
폭으은히 내려오는 눈발속에서는
낮이 붉은 처녀(處女)아이들도 깃들이어 오는 소리.…
울고
웃고
수구리고
새파라니 얼어서
운명(運命)들이 모두다 안끼어 드는 소리.…
큰놈에겐 큰 눈물 자죽,작은놈에겐 작은 웃음 흔적,
큰이 애기 작은이얘기들이 오부록이 도란그리며 안끼어 오는 소리.…
괜,찬,타,…
괜,찬,타,…
괜,찬,타,…
괜,찬,타,…
끊임없이 내리는 눈발속에서는
山도 山도 청산(靑山)도 안끼어 드는 소리.…
눈 오는 날, 생각해 보니 화요일 밤부터 일요일까지 집에 있을 수밖에 없었다. 눈 때문에 어디에 나갈 수도 없었다. 골목길의 눈까지 녹아내린 것은 월요일이 되어서야 가능했으니 말이다. 그래도 딱히 불편할 것은 없었다. 무엇이 내 마음을 편안하게 했던 것일까 생각해 보니, 나는 커피와 책과 노트북만 있으면 심심치 않게 살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삶의 파도를 타고 오르락내리락 하더라도, 갑작스러운 폭우나 태풍, 눈이 이렇게 내려 고립되어도 말이다. 아니, 뭐 식량도 충분히 있다는 전제는 해야겠다. 그리고 인터넷 연결은 잘 되어야 한다는 것도 전제해야겠다. 나가고 싶어도 못 나가는 것이 아니라 자발적 고립에서 편안함을 느끼는 내 마음도 포함해야겠다. 전제할 것이 참 많긴 하다.
오늘도 커피 한 잔으로 하루를 시작하다 보니 커피와 사람들의 사연이 딱 어우러진다는 생각이 들었던 만화 『허영만의 커피 한잔 할까요?』가 떠오른다. 특히 허영만 화백은 커피는 한 모금도 못 마시지만 군침 도는 향기를 그리기 위해 또다시 취재 노트를 쌓고 있다는 언급을 한 것에서 더 인상적으로 기억했던 만화다. 당연히 커피 맛을 세심하게 구분하며 맛을 보고 음미하며 그릴 줄 알았는데 커피를 한 모금도 못 마신다는 말이 신선한 충격이었다. 커피를 못 마시더라도 커피 종류에 따라 사람들의 사연을 잘 버무려서 이 책에 담아냈다.
『허영만의 커피 한잔 할까요?』 4권 29화는 「커피 크리스마스」이다. 치매에 걸린 할아버지가 종이컵으로 만든 크리스마스 트리, 눈 내리는 날 노부부가 함께 바라보는 종이컵 트리는 감동 그 자체였다. 마지막 장에 눈 쌓인 풍경과 함께 알랭 스텔라의 말이 여운을 남긴다.
커피는 영혼을 따뜻하게 데워주고 사람과 사람을 연결해준다.
_알랭 스텔라
그동안 매일 같이 마신 커피 중 특별히 기억에 남는 것은 역시 '사람과 사람을 연결해주는' 그 커피이다. 누구랑 같이 마시느냐, 어떤 배경에서 마시느냐가 같은 커피도 다르게 느끼도록 해준다. 그런 기억이 몇 가지 불쑥 떠오른다. 여행 중 휴식을 위한 커피 한 잔, 기운을 차리고자 마신 커피 한 잔, 그렇게 한 잔 한 잔 떠올리다 보면 그 장소에서 함께 했던 사람들이 어렴풋이 생각난다. 모두들 잘 지내고 있으려나?
파리를 떠나던 날 아침에 먹은 크루아상과 커피 한 잔이 떠오른다. 파리 유학 중인 동생을 만나러 가서 오랜만에 뭉친 우리 가족은 생각보다 일찍 끝나버린 여정에 아쉬움을 느끼며 커피나 한 잔 하고 가겠다고 의견을 모았다. 그러니 그것은 단순한 커피 한 잔이 아니었다. 그 당시의 상황과 분위기, 그리고 그 모든 기억을 생생하게 떠올려주는 도구가 되었다. 커피는 영혼을 따뜻하게 데워주고 사람과 사람을 연결해주고, 기억을 생생하게 남겨준 것이다. 특별한 의미를 가지는 카이로스의 시간이 되어 소중하게 남는다. 커피 한 잔이 주는 강한 여운이다. 스쳐 지나가버릴 법 한 기억을 잡아 끄는 힘이 있다. 오늘은 내 영혼을 따뜻하게 데우고 사람들을 떠올려보며 커피 타임을 갖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