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호접몽 May 09. 2021

정호승 시 「풍경 달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 外

놔두고 시간이 좀 흐른 후에 다시 펼쳐들면 새로운 책이 있다. 이 책 『광화문에서 읽다 거닐다 느끼다』가 그렇다. 이 책을 읽고 광화문글판 선정 과정을 알고 나니, 이 책의 가치가 더욱 느껴졌다. 그냥 누구 한 명이, 특히 높으신 분이 "이거 하자"라고 후딱 작품 선정하면 다들 손뼉 치고 그냥 그걸로 결정하는 게 절대 아니다.



1년에 4차례, 시인, 소설가, 교수, 문학평론가, 언론인, 광고인 등으로 구성된 광화문글판 문안선정위원회를 통해 선정된다는 것이다. 선정위원들은 교보생명 홈페이지에 올라온 시민들의 공모작과 각 선정위원들이 발굴한 추천작을 놓고 여러 차례 투표와 토론을 거쳐 최종작을 결정하는 것이니, 고민고민 끝에 하나 남는 귀한 글 아니겠는가.



끌리듯 집어 들어 목차를 살펴보는데, 정호승 시인의 시가 세 번이나 선택되었다. 어떤 시들이 광화문글판에 올랐었는지 정호승 시인의 시 세 편을 감상해본다. 도서는 작년 가을에 제공받았고 두고두고 아끼며 꺼내 들어 감상 중이다.






풍경 달다



정호승







운주사 와불님을 뵙고



돌아오는 길에



그대 가슴의 처마 끝에



풍경을 달고 돌아왔다



먼데서 바람 불어와



풍경 소리 들리면



보고 싶은 내 마음이



찾아간 줄 알아라


*2014년 여름




내가 사랑하는 사람



정호승







나는 그늘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그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한 그루 나무의 그늘이 된 사람을 사랑한다



햇빛도 그늘이 있어야 맑고 눈이 부시다



나무 그늘에 앉아



나뭇잎 사이로 반짝이는 햇살을 바라보면



세상은 그 얼마나 아름다운가





나는 눈물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눈물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한 방울 눈물이 된 사람을 사랑한다



기쁨도 눈물이 없으면 기쁨이 아니다



사랑도 눈물 없는 사랑이 어디 있는가



나무 그늘에 앉아



다른 사람의 눈물을 닦아주는 사람의 모습은



그 얼마나 고요한 아름다움인가


*2004년 여름




고래를 위하여



정호승







푸른 바다에 고래가 없으면



푸른 바다가 아니지



마음속에 푸른 바다의



고래 한 마리 키우지 않으면



청년이 아니지





푸른 바다가 고래를 위하여



푸르다는 걸 모르는 사람은



아직 사랑을 모르지





고래도 가끔 수평선 위로 치솟아올라



별을 바라본다



나도 가끔 내 마음속의 고래를 위하여



밤하늘 별들을 바라본다


2011년 겨울



시 감상을 매일 해나가다 보니 세상의 언어가 메마르지만은 않은 느낌이 든다. 어떤 시를 읽다 보면 '내 마음 한구석을 잘도 긁어냈구나!'하는 생각도 든다. 단지 인쇄된 글자일 뿐인 것이 아니라, 통통 튀어 올라 눈물도 되고 풍경도 되고 시도 되며 내 마음을 적신다.

매거진의 이전글 어머니 아버지 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