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참을 울었다. 코가 부어 목소리가 변할 만큼. 아래층 사는 동생 놈 놀랄까 봐 소리 내어 울고 싶은 걸 꾹 참았다. 사실 영화 속 김지영의 일상생활을 공감할 수는 없었다. 이유는 명확하다. 첫째 나는 돈 벌어다 주는 성실한 남편이 없다. 그래서 명절에 찾아가 설거지할 시댁이 없다. 둘째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다는 자식이 없다. 그 덕에 독박 육아를 해 본적도 없다. 82년 김지영의 생활은 처음부터 끝까지 지금의 나로서 도저히 살아 볼 길이 없는 ‘다름’ 이었다.
나는 공감이라는 영역을 경험이라는 한계 속에 가두어 두는 대화 방식이 늘 불편했다. ‘얘 안 낳아 본 사람은 몰라, 너도 결혼해 봐.’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내가 항상 드는 반기는 ‘너네는 서른아홉을 미혼으로 살아봤어? 결혼은 하면 되는데 니들은 죽었다 깨어나도 이제 처녀로 못 살아’. 속으로 볼멘소리를 한다. 경험이 필요 없다는 말이 아니다. 경험으로만 선을 긋기엔 우리가 함께 공감하며 나눌 이야기가 너무 많다.
그런데 사실 처녀 가장으로 살고 있는 내 입장에서 김지영은, 가끔 엄마가 하는 말을 빌려 쓰자면 호강에 겨워 요강을 쓰는 것 같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김지영의 삶에 무척이나 ‘공감’했다. 이 영화는 독박 육아하는 엄마들의 우울증을 다루는 영화가 아니다. 영화 후반부에서 정신과 선생님께 그녀가 털어놓는 말을 들으면서 나는 알았다. 내가 바로 김지영이었다는 사실을.
"선생님, 저는 이렇게 사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아요. 누군가의 엄마, 누군가의 아내로 가끔은 행복하기도 해요. 그런데 어떤 때는 어딘가 갇혀 있는 기분이 들어요. 이 벽을 돌면 출구가 나올 것 같은데 다시 벽이고 다른 길로 가도 벽이고 처음부터 출구가 없었던 건 아닐까……. 다른 누군가는 출구를 찾았을 텐데 저는 그럴 능력이 없어서 낙오한 거예요……. 왜 저만 엉망일까요?”
‘이렇게 사는 게 맞는 걸까? 이대로 정말 괜찮은 걸까?’ 나는 가끔 이렇게 먹먹한 순간을 만난다. 그때마다 영화 속 김지영처럼 출구 없는 미로 속을 혼자 걷고 있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두려움이 엄습한다. 다른 사람들은 그 출구를 잘 찾아가고 있는 것 같은데 나만 헤매고 있는 것 같아서 미칠 듯이 초초하다.
영화를 보면서 감추고 싶었던 그늘을 들킨 기분이었다. 김지영이 겪고 있는 감정의 수렁은 결혼의 유무나 육아의 경험과 상관없다. 자기 삶을 주도적으로 살고 싶어 하는 건강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만나 볼 법한 감정이라고 이해했다. 잘 살고 싶고, 가장 나다운 삶을 찾고 싶어서 병이 난 거다. 바란다는 것의 다른 말은 결핍이 있다는 말이니까, 간절히 바라는데 현실이 그렇지 않으니까, 오래 참고 기다리다가 아픈 거다.
어쩌면 그녀의 자상한 남편도, 무조건 내 딸이 먼저인 우리의 어머니들도, 가정사의 희로애락을 함께 나눈 사랑하는 형제들까지, 같은 병을 앓았을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모두 사회가 맺어준 관계 안에서의 역할과 의무에 지친 게 아니라, 진정한 나를 찾아가는 과정에서 이렇게 외로운 씨름을 하며 살아가고 있는 건 아닐까?
그렇다면 우리는 보이는 현상이나 삶의 모양이 아닌, 그 이면에 숨기고 있는 본질의 민낯을 서로에게 보임으로써 함께 공감하고 위로하며 살아갈 힘을 낼 수 있겠다. 그러니까 자꾸 애 낳아봤니, 나이 든 처녀로 살아봤니 하면서 후지게 놀지 않기로 하자. 그저 만나면 지금도 충분히 잘 하고 있다고, 가끔 헤매기도 하지만 내 삶의 자리를 잘 찾아가고 있다고 그렇게 말해 주어야겠다. 당신도 그럴 테니까. 우리는 모두 진정한 나를 찾아가고 있는 '김지영'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