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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race Aug 10. 2022

소리 풍경

강화도 양오리 어느 시인 서가에서, 흔들리는 나에게

아무도 말이 없었다. 친정 아빠 같은 어느 시인 서가에서, 나들이 길목을 걸었다. 슬그머니 부는 바람의 소리가 있었다. ‘괜찮아, 지금 잘하고 있어.’ 나는 꽤 영리해서 알아들을 수 있었다. 바람이 주는 위로를.      


나는 자주 흔들린다. 마치 잔잔한 호수에 돌을 던졌을 때, 그 파장에 밀려 멀리까지 출렁이는 물결처럼. 애써 숨죽여 나를 감추는 사이에 틈이 샜나 보다. 바람이 알아챘다. 흔들리는 나를.      


자연은 항상 나보다 앞서 있다. 애써 외면한 나를 만나게 해 준다. 오늘도 그랬다. 지금 내가 흔들리고 있다는 걸. 굳이 말해준다. 돌이 어디서 날아왔을까? 나는 또 왜 이리저리 출렁이고 있을까? 강화도 양오리 동네를 걷다가 발견한 흔들리는 나를, 어찌하면 좋을까?     


돌아오는 길에 만난 억새가 그랬다. 괜찮다고. 자기도 그렇게 흔들린단다. 걱정하지 말란다. 절대 꺾이지 않는다고. 그러니까 지금 모습 그대로 가던 길을 가라고. 억세게 생긴 억새가 생긴 것처럼 힘주어 말해주었다.     


바람과 억새의 사이가 그렇게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 바람은 불어야 소리를 내는데 그 때문에 흔들리는 억새는 신경질을 낸다. 바람은 성실하게 자기 일을 하는 건데 억새는 그런 바람이 어쩐지 못마땅하다.     


내가 내는 소리가 누군가에는 선이 고운 피아노 선율 같겠지만,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신경질이 나는 소리가 될지도 모르겠다. 모두에게 환영받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걸 잘 알면서 나는 자주 그 신경질에 발이 걸려 넘어진다. 여전히 모두에게 좋은 소리가 듣고 싶은가 보다.      


바람은 바람의 일을 하고, 나무는 나무가 할 일을 하고, 꽃은 피고 지고, 억새가 이리저리 흔들리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성실하고 아름다운 나다움이다. 그러나 자기다움이 모두에게 아름답게 보이는 것은 아니다. 억새가 바람에게 볼멘소리를 하듯이, 나다움이 옳다 하여 모두에게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내가 나다워질수록 나를 감추는 것에 익숙했던 내 자아는 불편했다. 몇몇 사람들 역시 변해가는 나를 보는 게 불편했나 보다. 그런 부대낌이 돌 수제비 띄우듯이 잔잔한 마음을 출렁이게 했다.     


이제 나는 괜찮다고 말해주고 싶다. 흔들리는 나에게. 자연의 소리처럼 내가 내는 소리는 풍경이 있다. 세상 모든 사람이 바람의 위로를 알아채는 것은 아니다. 억새의 격려를 평생 듣지 못할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이들 중에는 소가 하는 말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도 있다. 작은 새의 지저귐 속에서 삶을 배우는 사람도 있다.     


이처럼 모두는 아닐지라도, 내 소리를 알아주는 사람들이 있다. 애써 목청을 높이지 않아도, 오늘처럼 깊이 침묵하여도, 소리 없는 목소리로 이름을 부를지라도, 알아듣고 봐주는 사람들이 있다. 그래서 나는 내가 낼 수 있는 소리에 집중해 보려고 한다.      


바람의 위로와 억새의 힘찬 소리 덕분에 나는 오늘 내 마음에 띄운 돌 수제비를 힘차게 걷어차 버렸다. 나는 이제 그냥 걷기로 했다. 흔들리면 흔들리는 채로. 그러다 가끔 심하게 부는 바람에 꺾여도 괜찮다. 절대 뿌리가 꺾일 리는 없으니까. 나는 여전히 나로 존재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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