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일찍 퇴근한 금요일이다. 집에 오자마자 샤워를 마치고 냉장고에서 맥주캔을 꺼낸다. 빠각, 경쾌한 소리를 내며 마개가 꺾인다. 냉장고 문을 열어둔 채 그대로 한 모금을 마신다.
역시, 맥주는 첫 모금이다.
내 인생에서 가장 맛있었던 맥주는 명동에서 일할 때 주방에서 마시던 맥주였다. 제대하고 일년반 정도 호프집 주방에서 일을 했었다. 주방장님 음식솜씨가 좋고 맥주맛도 괜찮아서 장사가 꽤 되던 집이었다. 손님이 몰리는 날엔 하룻밤에 수백만원 어치를 팔아치우곤 했다. 재료가 동나서 더 이상 음식을 못 만드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심할 땐 음식 나가는데 한 시간이 걸린 적도 있었다.
그럴 때면 주방에 오더벨 소리가 끝없이 울렸다. ‘엘리제를 위하여’의 도입부 멜로디였다. 누가 악보 첫째 줄 끝에 도돌이표를 그려놓은 것처럼, 도입부만 끝도 없이 울리고 울렸다. 주문지는 두 줄인가 싶으면 세 줄이 되고, 세 줄인가 하면 네 줄로 불어나며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쌓여갔다. 120평 홀에 가득 찬 손님들을 먹일 주방직원은 나를 포함해서 고작 세 명이었다. 의외로 여자, 그것도 상당한 미모의 소유자였던 주방장님도, 웃는 것과 웃기는 것을 좋아하던 동생 성호도, 그리고 나도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양이라는 걸 알았다. 감당할 수 없음을 아는 상태로 어쨌든 최대한 빨리 음식들을 만들었고, 결국 그걸 꾸역꾸역 감당해내면서도 우리가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우리 스스로도 알지 못했다.
어른 키만한 대형 오븐과, 역시 대형의 튀김솥과, 6개의 가스렌지와 4개의 냉장고, 그리고 정신없이 움직이는 우리 세 명이 내뿜는 열기로 주방은 한겨울에도 땀이 줄줄 나게 더웠다. 입안에서 노란 맛이 나고 어질어질한 상태가 되는 일이 흔했다.
그러다 주문이 정말 끝까지 몰리면 오히려 맘이 좀 편해지던 게 지금 생각해도 웃긴다. 놔버리는 것이다. 어차피 늦을테니까. 물론 그렇다고 몸을 게을리 놀리진 않지만, 맘이라도 편하게 먹어버리는 것이다.
그럴 때의 주방장님을 지금도 기억한다. 오더기가 뱉어내는 주문지에서 만들어야 할 음식들의 목록을 불러주고 주문지더미 속으로 또 하나의 주문지를 묻어놓을 때, 주방장님은 종종 놔버리곤 했다. 아-. 체념인지 비명인지 모를 아-를 흘리고 나서, 양손으로 머리를 쓸어모으며 머리끈을 고쳐 묶던 모습이 지금도 선명하다. 그러고 나면 다 제쳐두고 홀로 나갔다. 어디갔지 싶을 때쯤이면 제일 차가운 500잔 세 개를 골라 맥주를 가득 담아서 양 손에 들고왔다.
그 맥주를, 그 ‘짠-’을, 그 맥주의 첫 모금을, 맛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