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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보노 Oct 29. 2020

그건 네가 노예근성에 쩔어 있어서는 아닐까?

- 노예의 도덕

니체는 이 세상의 도덕을 2가지로 분류했다. <주인도덕>과 <노예도덕>. 주인은 지배계급으로서, 강하고 자신감 넘치며, 진취적이고 긍정적이다. 노예들은 의지가 없고 나약하며, 의존적이고 매사에 부정적이다. 노예들은 자신들의 도덕인 겸손, 근면, 순종을 선이라고 포장한다. 그러나 주인에게 이것은 약함이었다. 노예들은 위에서 군림하는 주인을 악이라 규정지었다. 그리고는 주인을 악으로 매도한다. 강함은 잘난 척으로, 자신감은 오만함으로, 결단력은 독단으로, 긍정적 사고는 허세와 허풍으로 폄하한다. 노예의 도덕은 주인이 되지 못한 노예들이 주인에게 억압받아 생겨난 복수심과 원한에서 시작되었다. 그래서 주인은 노예들이 한심하다.


주인의 도덕은 다르다. 노예도덕은 세상을 선과 악으로 나누지만, 주인도덕은 좋음과 나쁨으로 나눈다. 주인의 도덕은 좋음이다. 자기 자신의 긍정에서부터 출발한다. 타자를 자유로운 존재로 인정하는 승인의 도덕이다. 노예의 도덕은 한심하고 나약하다. 노예들은 스스로 가치를 결정하지 못하기 때문에, 모든 것에 대해 부정만을 한다. 할 줄 아는 일이라곤, 방구석에서 키보드 붙잡고 분노를 쏟아내는 일이다.


최저임금이 상승하면, 실업률은 올라간다. 최저임금을 높여, 소득을 증대시키면, 경제가 성장한다는 말은 거짓말이다. 이는 경제학의 기본원리이다. 2층 높이에서 사과를 떨어트리면, 수직낙하하는 물리의 법칙과도 같은 것이다. 최저임금을 올리려는 주장의 유일한 근거는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최소한의 생활비 보장이다. 그런데, 이 사람답게 사는 것의 정의는 제각기 다르다. 어떤 이는 1년에 2번씩 해외여행을 가는 삶이 인간답게 사는 삶이라고 하고 어떤 이는 한 달에 한번 정도 외식하는 걸로 만족한다. 생각은 다르고 이해관계는 상충하며, 모두가 만족할 순 없다. 그러던 중,  2018년과 2019년은 말도 안 되는 상승률로 최저임금이 상승했다. 기업들은 버티겠지만, 소상공인들은 죽는소리를 했다. 이때, 인터넷의 백수들은 소상공인을 적폐로 규정하고 알바비 줄 돈 없으면, 사업을 접으라며, 조롱했다. 노예의 도덕이다. 이들은 남의 고통을 보면 기분이 좋아지고, 남을 고통스럽게 만들면 더욱 기분이 좋아진다. 그러나 제 발등을 찍었다. 실제로 많은 소상공인들은 폐업을 했다. 남은 소상공인은 자신이 더 일하고 가족들을 가게로 불러, 생계를 이어갔다. 이제 편의점같이 몸 편한 아르바이트는 2000자 자소서를 써서 제출해야 하는 세상이 되었다. 노예의 도덕이 판치는 세상이 되었다.


늑대가 토끼를 사냥한다. 토끼에게 늑대는 무서운 포식자다. 토끼를 잡아먹는다. 늑대는 절대적인 악이며, 토끼는 악에게 희생당한 선이다. 그러나 선악을 구분하는 토끼의 마음은 노예의 도덕이다. 약함과 무능을 선으로 위조하려 든다. 천박함은 겸허로, 증오하는 대상에게 복종하는 것은 순종으로 바뀐다. 비겁함과 우유부단함은 인내라고 부른다. 도망침은 용서라는 말로 바뀌었다. 주인의 도덕을 가진 토끼였다면, 살기 위해, 늑대보다 더 빠르게 뛰었을 것이다. 생존을 위해 노력했을 것이다. 노예도덕은 붙어보기도 전에 패배를 기정 사실화하고 변명과 자기위안을 위해 현실을 왜곡한다. 주인도덕은 승리를 위해,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한다. 그것이 삶에 대한 태도의 차이이다.


우리 사회는 노예도덕으로 병들어 있다. 사회가 무너지고 있다. 혐오가 만연하다. 위로 올라가려는 자는 다리를 붙잡아 아래로 끌어내리고, 나보다 약한 자에게는 한없이 가혹하다. 나와 우리 편은 절대적 선이고 상대 편은 절대적 악이므로 정의의 심판을 내리겠다는 홍위병과 서북청년단은 나날이 커밍아웃을 하고 있다. 노예의 도덕에서 탈출해야 한다. 노예도덕에서 벗어나고 주인의 도덕을 섬겨야 한다. 1894년 갑오개혁 이후, 우리나라는 노예제가 폐지되었다. 누구도 노예로 태어난 사람은 없다. 힘든 삶에 노예의 도덕은 달콤하고 위안이 되겠지만, 종국에는 자신과 사회를 병들게 만드는 악마의 유혹이다.


결국에는 더 가지고, 더 강하고, 더 좋은 주인의 도덕을 가진 사람들이 먼저 손을 내밀어야 한다. 노예는 세상을 선과 악, 이분법으로 바라보아, 주인을 받아들일 수 없다. 주인은 좋고 나쁨의 대립으로 환원되는 고귀한 가치평가 방식을 가지고 있기에, 노예를 껴안을 수 있다. 지금은 노예도덕에 사로잡혀있는 한심한 얼간이이지만, 스스로 약함을 멀리하고 강함을 추구하게 되면, 주인도덕의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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