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보노 Nov 01. 2020

마지막 갈림길의 기로에서

- 시지프 신화

참으로 진지한 철학적 문제는 오직 하나뿐이다. 그것은 바로 자살이다. 인생이 살 만한 가치가 있느냐 없느냐를 판단하는 것이야말로 철학의 근본문제에 답하는 것이다.


모든 사람에게는 자기 자신만의 존엄성이 있다. 상처를 받고 고통을 겪어도 마지막 남은 존엄성을 가지고 최대한 견디어 살아간다. 더는 못 견딜 상황이 온다면, 차라리 세상을 떠나는 게 나을 수도 있다. 현재의 고통과 미래의 추산되는 잠재고통의 합이 앞으로 얻을 수 있는 행복보다 그 크기가 크다면, 더 살아갈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가난한 자에게는 돈 있는 자가 모르는 고통이 있듯이, 돈 있는 자에게도 가난한 자가 모르는 고통이 있다. 한국 최고 재벌가의 막내딸도 머난 먼 이국땅에서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차라리 죽여달라며, 고통 속에 울부짖는 말기 암환자에게 안락사를 허용하는 것과 허용하지 않는 것 중 무엇이 더 윤리적인 행동인가. 우리는 타인의 철학과 신념, 개인의 가치와 존엄에 대하여, 왈가불가할 자격이 없다. 인간은 본능에만 충실하거나, 굶지 않으려 사는 짐승이 아니다. 인간은 인간의 존엄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스스로 자살을 선택할 수 있다.


삶의 주체는 온전히 자기 자신이어야 한다. 가족의 눈물 때문에 살아가는 인생이라면, 그 가족들이 사라지고 난 이후의 삶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가족과 친구가 없는 사람이 자살을 결심했다면 뭐라고 말을 할 수 있을 것인가. 남은 인생이 살 값어치가 있는지 없는지를 판단하는 것. 그것은 오로지 자기 자신이어야 한다. 이 숭고하고 중대한 판단에 외부적인 것이 개입해서는 안된다.


신들은 시지프에게 바위를 산꼭대기까지 끊임없이 굴려 올리는 형벌을 내렸다. 그런데 이 바위는 자체의 무게 때문에 정상에 올라가면, 다시 굴러 떨어지곤 했다. 그리곤, 처음부터 바위를 다시 올린다. 무용하고 희망 없는 노동이다. 이것이 신들이 내린 영원의 형벌이었다. 돌이 순식간에 저 아래 세계로 굴러 떨어지는 것을 바라보면서, 시지프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저 새까만 어둠 속으로 다시 내려가야 한다. 시지프 신화가 비극적인 이유는 주인공의 의식이 깨어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 한 걸음, 한 걸음 옮길 때마다 성공의 희망이 그를 떠받쳐준다면 무엇 때문에 고통스러워하겠는가. 이것은 부조리다. 


근원적 사실과 근원적 물음에 대답하지 못한다. 왜 사는가. 왜 삶인가. 막연하고 아연하다. 알 수 없는 것에 대해 한없이 깊은 공포감이 든다. 우리의 운명도 이 시지프의 형벌과 다르지 않다. 돈을 벌기 위해서 매일 집을 나선다. 똑같은 쳇바퀴를 30년이고, 40년이고 굴러야 한다. 끝없는 무의미의 반복이다. 이 쳇바퀴를 탈출하면, 사회부적응자로 낙인찍히고 돈이 없어, 아사 또는 고독사라는 경로를 타게 된다. 알베르 카뮈에 의하면 부조리는 인간의 숙명이다. 이 세계가 합리와 비합리, 도덕과 배덕, 긍정과 부정, 고통과 기쁨, 삶과 죽음, 광기와 이성 등 반대되는 두 항으로 양립하는 것은 필연적이다.


징벌의 부조리를 직시한 시지프는 그 부조리를 정통으로 응시하며, 그 부조리를 온몸으로 살아내기로 작심한다. 개인적인 운명은 있어도 초월적인 운명이란 없다. 저주받은 운명 또한 나의 운명이다. 앞으로 살아갈 날들의 주인은 역시 나다. 내 삶을 사는 것. 운명에 반항하는 것. 자유를 느끼는 것. 그것이 바로 사는 것이다. 악전고투 끝에 또다시 바위를 정상에 올려놓는 순간, 자신의 고역에 한없는 자부심을 느낀다. 벌이란 죄에 대해 일정한 고통을 주는 행위이지만, 벌에서 고통이 아닌, 행복을 느낀다면 그것은 이미 벌이 아니다. 신과 운명에게 엿을 먹이는 것. 그것이 <반항적 인간>이다.


그리고 바위는 또다시 아래로 떨어진다.


만약, 자살을 결심했다면, 마지막으로 이성의 차가운 검증을 통과해야만 한다. 찬 공기에 냉기를 머금은 시험대에 자신의 결정을 올려본다. 당신은 오늘 죽지 않고 내일 죽는 것을 선택할 수 있다. 바뀌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 주어진 24시간의 시간 동안 생을 정리하며, 좋아하는 것, 행복했던 기억을 떠올려 보자. 마지막 순간 만큼은 즐거운 기억으로 생을 마감하도록 하자. 마지막 만찬으로 치킨을 시켜먹을 수도 있다. 치킨이 아니라, 더 비싼 한우구이를 먹을 수도 있다. 절친이나, 고향의 가족을 찾아가 얼굴을 볼 수도 있다. 어차피 100년 안에 죽을 인생인데, 그 날이 꼭 오늘이어야 할 필요는 없다. 어차피 자살할 삶이라면, 남은 가족을 위해, 생명보험을 들어놓자. 사고사나 병사가 아닌, 자살은 보험 가입 후 2년이 지난 후 사망보험금을 받을 수 있다. 최소 2년은 더 살아야 한다.


고통의 크기를 잘못 계산했을 가능성이 높다. 호르몬의 비이상적인 분비가 스스로를 괴롭게 만들었다. 이는 질병이다.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아야 하는 질병이다. 채무에 대한 문제라면, 다행히 개인파산제도가 있다. 모든 것을 잃었다고 생각했겠지만, 몸뚱아리는 남아 있다. 빚은 면책되고 새 삶을 살 수도 있다. 사람과의 관계가 문제라면, 그 관계를 거부할 수도 있고 근본 원인을 제거하는 방법도 있다. 선택은 여러 가지가 있으며, 죽음, 그 한 가지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자살이야 말로, 철학적 질문의 가장 마지막 관문이다. 왜 자살하지 않느냐는 질문은 왜 사느냐와 같은 말이다. 질문의 답을 찾지도 못한 채 결심한 자살은 삶을 직시하는 의식에서 삶의 밖으로 도피하는 치명적 유희일뿐이다. 죽음은 도피처가 아닌, 정당한 선택의 결과가 되어야 한다. 세상을 살아야 하는 이유와 가치를 못 찾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첫 번째 이유는 확실하다. 존엄을 지키는 것이다. 나의 존엄이 고귀하듯이, 그대의 존엄도 고귀하다.

이전 13화 그건 네가 노예근성에 쩔어 있어서는 아닐까?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