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에서 봄까지
게으른 나는 추운 날씨에 더 웅크리게 된다. 겨울에는 다들 그러겠지? 위로하며 한껏 더 게을러진다. 집에만 있다 보면 계속 따뜻한 곳을 찾게 되고 눕게 되고 잠이 들고... 그런 내 모습이 싫어 밖으로 나가려 애쓴다. 집에 들어와서도 실내복으로 갈아입지 않는다. 그러면 침대에 못 들어가니까 나름대로의 편하지 않은 생활을 할 수 있게 된다.
또 다른 해가 시작되면서 생각이 많아진다. 이제는 30대 초반이라 할 수 없는 나이가 퍽 부담스러워 생각을 주체할 수 없는 날이 있다. 그런 날은 몸은 푹 내려앉아서 도무지 움직일 수가 없는데 그러다 보면 생각이 나를 더 짓누른다. 그래서 억지로 나가본다. 마음을 잡을 수 있는 방법이 뭐가 있더라... 그러다 불현듯 하루키와 김연수의 달리기가 생각났다. 작가들도 한다는 달리기를 해볼까. 그렇지만 내게 달리기는 무리라.. 걷기 시작했다.
집 근처 샛강을 따라 걷다 보면 서울에 이런 곳이 있었나 하는 숲들이 나온다. ‘뱀 조심’이란 푯말도 보이고 수많은 생명체(?)를 마주하기도 한다. 그리고 가운데로는 강(이라고 하기엔 조금 무리가 있지만 이름이 샛강이니까)이 흐른다. 걸으면서 졸졸졸 흐르는 물소리를 듣다 보면 어느새 마음도 편안히 흐르고 있다. 그렇게 영등포까지 걸으면 한 시간이 안 걸린다. 일단 다리도 조금 아프고 힘들어서 잡생각이 줄어든다. 그래서 걷기와 달리기가 좋은 건가? 어느 날은 63 빌딩 쪽에서 시작하는 한강에서부터 마포대교를 건너 마포역까지 가기도 한다. 마포대교는 사람도 많고 보행도로도 잘 되어있어 걷기 좋은 다리다. 그렇지만 날씨를 꼭 확인하시기를. 바람이 부는 날엔 몹시 추워서 집에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들기 때문이다.
그렇게 걷다 보니 어느새 봄이 왔다. 우리 동네는 벚꽃이 유명한 동네다. 여기에 살면 언제라도 나가서 아름다운 벚꽃거리를 걸을 수 있다는 것이 좋은데, 반면 주말에 창밖을 보면 거리가 사람들로 가득해 나갈 수가 없다는 단점이 있다. 사람이 없는 틈을 타 벚꽃거리로 나가본다. 벚꽃나무를 자세히 보니 같은 나무에 같은 줄기라도 어떤 꽃은 활짝 피어있고, 어떤 꽃은 아직 필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활짝 핀 꽃은 지금이 가장 아름답고 빛나는 순간이고, 아직 피지 않은 꽃은 그 순간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며칠만 지나면 활짝 핀 꽃은 이미 져있고, 꽃봉오리였던 그 꽃은 만개해있겠지. 다 각자의 때가 있는 것인데, 나의 시간이 아직 오지 않았는데 만개할 시간을 기다리며 초조해하진 않았는지.. 활짝 핀 사람들을 보며 부러워하진 않았는지 생각해본다. 다른 사람에게 빛나는 순간이 왔다면 나에게도 반드시 온다. 아직 그 시간이 되지 않았을 뿐. 우리는 당연히 올 그 시간들을 묵묵히 기다리면 된다.
낮에 더운 걸 보니 봄도 막바지인가 보다. 이런 날씨가 가장 걷기 좋은 날인데, 낮에는 햇빛으로 따뜻하고 밤에도 그다지 춥지 않아서다. 금세 여름이 오면 또 덥다는 핑계를 댈 수 있으니 지금 나가서 걸어보시기를. 걸으면 다-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