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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상은 Jul 25. 2020

11. 하라는 취업은 안 하고

프리랜서로 살아남기

※주의※ 이 글은 드라마 리뷰가 아니라는 점을 미리 알려 드립니다. 하라는 취업은 안 하고, 정말 딴 거 하고 살고 있는 프리랜서의 길지도 짧지도 않은 변명입니다. 

"아무것도 아닌 내가 나대고 다녀서 9명이었던 해고자가 10명이 되었어.

내가 그날 밤 말했던 것처럼 나도 내 자리에서 내가 해야 하는 일 

나만 할 수 있는 일을 할 거야. 그래서 9가 10이 되지 않게 할 거야."

"그리고 구세라는 9명도 신경 쓰겠지."


수목드라마 <하라는 취업은 안 하고 출사표>에서 나온 대사입니다. 매회마다 같은 92년생으로 절절하게 울고 있는 이유는 주인공 구세라가 하는 말이 꼭 제가 해왔던 말과 닮아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프리랜서로 살겠다고 다짐한 건 쉽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보면 저는 취업 시장에서 '패배자'나 다름없었거든요. 흔한 영어 성적도 없고, 학벌이 좋은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필사적으로 취업준비를 했던 것도 아니었고, 학벌을 세탁한다고 외국에 나갔다 올 배짱 있는 글로벌 마인드가 있지도 않았거든요. 드라마 제목처럼 '하라는 취업은 안 하고' 택한 게 프리랜서였습니다.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큰 회사의 인턴으로 들어갈 기회도, 시험 준비만 오래 해도 될 만큼의 재력을 갖지도 않았습니다. 풍요롭게 살았지만 통장이 풍족한 건 아니었으니까요. 적당히 살았다는 표현이 무색하게도 요즘은 이런 것도 흙수저라고 불리는 시대입니다. 노력을 아예 안 했던 것도 아닙니다. 다만 노력할 시간이 부족했습니다. 당장 통학 버스비를 내기도 바빴고, 생활비를 벌어야 하니까 별의 별일을 다했습니다. 평일, 주말 가릴 것도 없이 방학에도, 반년 휴학계를 냈을 때도 저는 끝도 없이 돈만 벌었습니다.


그 돈을 다 모아뒀으면 참 좋았겠지만 아쉽게도 저는 전부 다~ 싹 다 갈아엎어 학교 다니는 내내 홀라당 까먹었습니다. 반년 휴학을 한 덕에 코스모스 졸업을 하는 영예를 얻었지만 졸업식을 하지 않아 집으로 돌아오는 통학버스 안에서 기사님의 축하 인사를 받고, 곧바로 원고를 썼습니다. 졸업식날이 월급날이었고, 마감날이었거든요. 

네..?

삐- 서류부터 탈락입니다


대기업 인턴 자리는 제게 사치였습니다. 공기업 준비, 공무원 시험.. 전부 다 제게는 어울리지 않는 옷을 입는 듯한 기분이었죠. 지방 4년제. 전공을 두 개나 하는 부심을 부려봐도 소용없었습니다. 애초에 지원자격이 영어 점수였거든요. 듣기만 해도 서류 탈락의 냄새가 나죠?


그러게, 왜 안 따뒀니?라고 묻는다면 시험비가 아까워서, 열심히 벌어둔 돈으로 학원에 시험까지 쳤는데 유효기간이 X 나게 짧아서 그렇다고 답하곤 했습니다. 쌈박한 대답이죠? 친구들 사이에서는 대단하다며 엄지를 치켜세워줬지만 냉혹한 취업 시장에서는 그냥 탈락자의 구차한 변명에 불과했습니다.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갖출 건 갖춰야 한다는 거. 어쨌든 세상은 내 노력을 다 알아줄 수 없다는 것과 내가 사장이었어도 기준을 잘 갖춘 지원자를 뽑겠다는 걸 스스로 깨우쳤거든요. 

말해봐, 내 이력서에 뭐가 문젠데

9년 묵은 알 X몬 이력서


그나마 저를 먹고살게 한건 9년 전에 공들여서 쓴 알바몬 이력서입니다. 저는 곧바로 대학에 진학한 게 아니라 2년의 공백기가 있었습니다. 당차게 20살의 패기로 돈이나 왕창 벌자고 아르바이트를 하자고, 마음먹고 자기소개서를 열심히 썼죠. 참고 자료를 숱하게 봤지만 뭐- 그건 그거고 나는 나니까 라는 마음으로 썼습니다.


형식 파괴, 내 멋대로 소설을 한편 멋들어지게 작성하고 올렸습니다. 패기가 좋았는지 각종 모든 아르바이트 사장님들이 연락을 해주시더라고요. 아마 어려서 한몫했을 가능성도 있지만요. 약발이 떨어졌을 쯤에 귀한 힘을 발휘해 불경기 속에서도 저는 살아 있습니다. 


형식에 맞지 않은 이야기를 제 느낌대로 썼을 뿐인데, 그래도 만족해하는 분들은 세상에 있었습니다. 여전히 저는 그런 분들을 소금 같은 분들이라고 말합니다. 누가 봐도 비주류 냄새가 폴폴 나는 글인데, 이 정도 가치관이면 같이 일해볼 만한 인재라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근데 어릴 땐 그게 칭찬인 줄 알았거든요? 그게 열정 페이의 시작이더라고요.

제 월급..코딱지

10명 중에 한 명이 좋아할까 말까 한

자기소개서의 비참한 말로


살아있는 스타트업의 시초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발로 참 더럽게 많이 뛰었습니다. 10시간 이상을 서서 일해도 캔디처럼 방긋 웃고, 월급날이 지연되어도 괜찮다고 호호 웃었거든요. 이상한 사람들에게 스토킹을 당하기도 했고, 진상 고객들과 대판 싸운 날도 더러 있었죠. 그래도 괜찮았습니다. 제 열정은 돈으로 살 수 없다고 칭찬해주는 사람들이 있었으니까요. 캔디 같았던 마인드에 현실적인 딱지가 붙은 건 동갑내기 다른 아르바이트생의 말 한마디에서였습니다. 어떤 알바는 4년 제라고 하면 더 준다고. 


충격이었습니다. 고졸은 돈도 못 받는구나를 절실하게 느꼈습니다. 하긴 그럴 만도 했습니다. 아르바이트를 일주일에 3개를 넘게 하는데, 제 월급은 150만 원도 안되었거든요. 집으로 돌아와 대학을 가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아무리 돈이 좋아도, 남들처럼 기본은 가져야겠다고 생각했거든요. 넉넉하지 않은 형편이니 일하면서 공부하면 적어도 쥐구멍에 볕뜰날은 오겠거니 하는 마음으로 시작했습니다.

세상에..로켓이 아니라 수레였네?

반지하에도 해는 뜬다, 잘 안보일 뿐


우여곡절 끝에 들어간 대학에서 이를 악물고 다녔습니다. 통학시간만 왕복 3시간이 넘게 걸렸지만 복수전공까지 할 정도로 저는 참 열정 넘치게 살았습니다. 아르바이트하는 시간이 줄었으니 대외활동에서 받는 활동비로 살아야겠다고 생각해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니기도 했습니다. 수입은 꽤 짭짤했습니다. 재밌기도 했고, 왠지 우아하게 돈 버는 기분이었거든요. 


"근데 넌 어느 회사 갈 거야?"

"회사?"

"취업 준비해야지, 나 이거 하는 거 스펙으로 쓸려고 하는 거잖아"


같이 활동했던 친구가 스펙 채우려고 하는 거라고 했을 때 저는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남들은 스펙으로 쓸려고 한다는 대외활동. 저는 알차게 벌고 싶어서 시작했으니 말문이 막힐 수밖에요. 그날만큼은 커트라인에 걸려 대롱대롱 달려 있는 기분이었습니다. 그래서 더 열심히 대외활동을 했습니다. 다른 선배들에게 조언을 얻기도 하고, 공모전에 나가 상을 타오기도 하고. 어떻게 하면 매력적인 사람처럼 보일까 숱한 강의를 듣기도 했죠. 간절함이 통했던 걸까요. 졸업 1년을 앞두고 한 스타트업 대표가 같이 일해보자고 스카우트 제의를 했습니다. 곧장 휴학계를 내고 로켓에 올라탔습니다. 


아! 이제 나도 자격이 갖춰진 사람이구나 싶었습니다. 12시간을 넘게 일하고, 모르는 건 찾아가 배웠습니다. 아는 사람, 모르는 사람 가릴 것도 없이 영업에, 마케팅에, 콘텐츠 구상에.. 1인 다역을 소화해내면서도 그래도 참 좋았습니다. 어쨌든 저도 이제 트렌드에 맞는, 자격이 갖춰진 사람이었으니까요. 사무실이 비록 반지하였지만 언젠간 크게 성공할 거라고 굳게 믿으며 말이죠. 


그러나 반지하에 뜨는 해는 결국 반밖에 안 보인다는 걸 알았습니다. 재정 상태가 공개되면서 저는 파리 목숨이라는 걸 눈 앞에서 보고야 말았습니다. 마음 따뜻한 동료들도 눈물을 흘리며 떠났고, 뻔뻔한 대표들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쥐도 새도 모르게 사무실을 정리했습니다. 어떻게든 해볼까?라는 다짐을 안 했던 건 아닙니다. 하기야 했죠. 하지만 곧 결혼을 앞둔 동료를, 묵묵하게 제 할 일을 최선을 다한 착한 동료를.. 제가 손잡아준다고 한들 무슨 소용일까요. 4대 보험 조차 내줄 수 없는 같은 처지인데. 


제가 선택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라는 사실이 모든 걸 무너트리게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수습만큼 먹고 살길을 찾는데 집중했습니다. 슬퍼도. 아파도. 저는 다시 기준에는 들어가야 했으니까요. 이대로 지원자격조차 없는 사람으로 남는다면 제 인생은 진짜.. 최악이 될 거 같았거든요. 

ㅈ돼다

한마디로 ㅈ됐으니 

되는 거 하고 살자


그날의 쓴맛은 쓰다 못해 아주 저리게 아팠습니다. 지금은 그때 그 시절을 옛 동료와 함께 회상하면서 지나간 대표들을 욕하는 재미에 살지만요. 뼈를 깎는 고통으로 다시 운동화 끈을 매고 달렸습니다. 뒤도 안 돌아보고 숨 좀 헐떡이면서 살았습니다. 다시 학교로 돌아가 남은 학점을 이수했고, 좋은 점수로 졸업했습니다. 남들처럼 이력서를 쓰기도 했고, 누구처럼 스펙을 쌓기도 했지만.. 결론은 제 자리는 하나도 없었습니다. 모든 대기업은 다 떨어졌고, 3개월 단기 인턴도 구하기 힘들더라고요. 


제가 실패를 하는 동안 친구들은 대기업에서 인턴을 하고 정규직을 갖고, 여러 차례 명성 높은 곳으로 이직을 하는 걸 보면서 세상은 해도 안 되는 벽이라는 게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미 한차례 쓰나미가 지나간지라.. 큰 타격은 없었던 거 같아요. 더 나이브하게 말하자면 이미 ㅈ됐는데 이쯤이야..라고 웃었던 거 같네요. 그래서 가장 슬펐을 때, 함께 으쌰 으쌰 했던 동료들이 책상을 함께 비울 때를 떠올리며 생각했습니다. 


"나도 내 자리에서 내가 해야 하는 일, 나만 할 수 있는 일을 할 거야"


내 자리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 남들 기준 말고, 내 자격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하자고 다짐했습니다. 쥐구멍에 볕 뜨기만을 기다리지 말고, 반지하에 들어오는 볕도 느끼면서 살자고. 언젠가 아스팔트 사이에 홀씨가 날아들어가 꽃 하나 정도는 피우고 살 테니. 제 몫을 다하는 사람으로 살자고. 그렇게 프리랜서를 시작했습니다. 하라는 취업은 안 하고 말이죠. 

 

이 결심은 하루에도 수십번 땅을 치게 하기도 합니다. 똑 떨어진 수입으로 울기도하고, 냉장고 파먹기가 일상인이지만. 그래도 말이죠, 적어도 후회하지 않는 사람이 되어 있는 스스로를 볼 땐 가엾고, 안타깝고, 마음 아프지만 한편으로는 대견하다고 칭찬해줍니다. 내 자리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알고 있으니 그것만큼 맘편한게 없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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