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닮은 내담자

episode 5.

by 상희

팀장님께서 새로 배정된 사례라며 상담 신청서 하나를 건넸다. 오랜만의 새로운 사례라 약간의 기대감이 올라왔다. 이번 내담자는 어떤 내담자일까? 상담 신청서의 앞부분부터 빠르게 읽어 내려간다. 여성에, 미대생, 그리고... 그러다가 멈칫. '상담 신청 이유'란을 보자 몸이 굳었다. 같은 문장을 읽고 또 읽는다.


- 상담 신청 이유
: 엄마가 투병 중이신데, 다른 사람들한텐 얘기를 해본 적 없어서 혼자 끙끙 앓고 있는 기분이에요. 요즘 몸도 마음도 지쳐요. 상담에서 엄마에 대해 얘기해보고 싶어요.


그 간결한 상담 신청 이유는 아무렇지도 않게 나를 멈춰 세우곤, '상담자'가 아닌 '나'를 끄집어냈다. 그 내담자는 과거의 나를 너무나도 닮았다. 성별도, 학부 때 전공도, 그리고... 엄마의 투병도.


빠르게 머릿속에 기억들이 스쳐 지나간다.

버스 뒷자리에서 숨죽여 울던 교복을 입은 나, 수척해진 채로 병상에 누워있던 엄마의 모습, 친구들 앞에서 억지로 미소 지었던 순간, 그때 내가 했던 생각, 감정들이 머릿속을 뒤덮었다.


'이 사례, 나한테 괜찮을까?'


사례를 리퍼할까도 생각해 봤지만, 돌이켜보니 나의 아픔은 이미 시간이 많이 지난 일이었다. 이미 10년도 더 되었다. '현재'에 직면해 있는 내담자와 달리, 나는 '과거'에 대한 부분이었으므로 부딪혀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군말하지 않고 내담자에게 전화를 걸어 1회기 상담 시간을 예약했다.



그 누구도 보지 않고 피하려고만 하는


"상담에서 어떤 얘기하고 싶으셨어요?"


상담을 시작할 때 으레 묻는 질문에, 앳된 얼굴의 내담자는 잠시간 고민했다. 그러다 입가에 약간 미소를 지은 채로 내 시선을 피하며 답했다.


"신청서에 다른 걸 적긴 했지만, 요즘 갑자기 친구 고민이 생겨서요.. 이 거에 대해서 얘기해도 괜찮나요?"


내담자의 말에 약간 망설여졌다. 충분히 다른 얘기를 해도 괜찮지만, 어쩐지 내담자가 엄마에 대해 얘기하는 것을 피하고 싶은 것처럼 느껴졌다. 부딪혀볼까 아님 조금 더 때를 기다릴까? 잠시 고민하던 나는 후자를 택했다.


"그래요, 어떤 고민이 있으세요?"


친하게 지내는 건지, 아닌 건지 모르겠는 모호한 관계. 하고 싶은 게 있는데 같이 하자고 물어볼지 말지에 대한 고민. 너무 많은 사람들이 모여있으면 무슨 얘기를 꺼내야 할지 모르겠는 마음 등등. 친구에 대한 고민은 몇 회기를 걸쳐 이어졌다. 하지만 알맹이가 빠진 내용이었다. 내담자는 가장 중요한 중심을 빼놓고 주위를 뱅글뱅글 돌았다. 중심엔 가장 마주하기 싫은 부분이 있다. 지금껏 다른 사람들한테는 한 번도 얘기해보지 않은, 그 마주하기 싫은 중심이.


하지만 뱅글뱅글 도는 그 과정을 함께하며 때를 기다리는 줄 알았던 나는, 한 번씩 내담자가 중심을 향해 발을 내딛을지 고민하는 순간에 힘을 실어주지 못했다. 이젠 한번 중심으로 가보자, 하고 내담자에게 손짓하는 것이 아닌 뱅글뱅글 도는 내담자의 모습을 그저 지켜보고만 있는 것 같았다. 뭐지? 언제부터 나는 이렇게 엄마 얘기를 하게 될 때만 기다리고 있었던 거지?


"아무래도 역전이* 같지...?"

* 역전이(countertransference): 상담자가 내담자의 감정에 지나치게 영향을 받거나, 자신의 과거 경험이나 감정이 투사되는 것.


동기에게 하소연하듯 고민을 털어놓는다. 같은 지점만 맴돌고 있는 상담에 관해.


"둘 다 엄마의 투병에 대해 얘기하고 싶지 않아 하는 것 같아. 내담자는 한 번도 얘기해 본 적 없는 부분이라 털어놓기 두려워서 친구 문제로 피하고 있고, 나는 과거의 일이더라도 '엄마의 투병' 경험 자체가 나에게 괴로웠어서 이걸 주제로 얘기하기 무서워하고 있는 것 같아."


과거의 일이었어도 '엄마의 투병'은 내게 너무 의미가 깊고 비극적인 경험이었다. 내담자가 상담에서 꼭 털어놔야 하는 얘기가 나의 과거와 동일했기에, 나는 내담자에게 나의 감정을 계속 투사하며 대화를 회피했다. '얘기하면 지금까지 꼭꼭 눌러왔던 감정들이 터져 나올 거야', '그럼 많이 힘들어질 거야'... 하지만 내담자는 과거의 나와 다르다. 아무도 없던 나와 달리, 내담자에겐 그의 얘기를 들어줄 수 있는 상담자가 있다. 물론 역전이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었지만.


"네가 그런 모습을 알아차렸으면 됐어. 이젠 상담자의 역할을 해."


이미 알고 있으면서 뭘 새삼. 동기의 미소가 그런 의미로 읽혔다. 그 미소에 나도 덩달아 웃는다.

이번 오답 노트는 다음과 같다.


나와 닮은 내담자를 상담할 땐, 역전이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하라.


다음 상담 시간에 온 내담자는 평소와 달리 표정이 좋지 않았다. 그 표정을 유심히 읽는다. 한 주간 내담자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고, 그 일이 지금 내담자의 마음을 복잡하게 하는 것 같았다. 어쩌면 그 일은 엄마와 관련된 일일 지도 모른다. 지금이 그때가 다가온 것처럼 느껴졌다.


"오늘 상담에선 어떤 얘기하고 싶으셨어요?"

"오늘 상담은..."


내담자가 고민한다. 중심을 향해 한 걸음 뻗을까? 아니면 다시 주위를 돌까?

나는 이젠 부딪혀보겠다고 다짐한다.


"아까 올 때부터 표정이 안 좋아 보였는데, 무슨 일 있었나요?"


그 말에 내담자는 흠칫 놀랐다. 나를 바라보는 내담자의 눈시울이 점차 붉어진다.


"... 사실 엄마의 상태가 더 안 좋아졌어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그렇게 용기 내어 얘기한 순간,

이제 진심을 얘기할 수 있게 되었다.

나도, 내담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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