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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angillness Jul 25. 2020

평범한 글, 색깔은 회색

1

나른하게 까라지는 오후, 평범한 프랜차이즈 카페였습니다. 할 일 없이 자리에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을 곁눈질로 훔쳐봤습니다. 그러면서도 '이래도 되는 걸까?' 하는 질문이 스멀스멀 올라왔지만, 어쩔 수 없었습니다. 사람이 사람을 보는 것. 그것보다 재미있고 설레는 일이 또 있을까요.

2
창밖으로 어린아이 한 명이 지나갑니다. 무슨 일인지 얼굴이 회색빛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테이블을 긁으며 멀어져가는 아이의 뒷모습을 바라보는데, 작은 어깨에 매달린 가방이 너무나 무거워 보입니다. 벌써 어깨가 무거우면 다 가보기도 전에 금방 지치지 않을까, 괜한 오지랖이 튀어나옵니다. 신발을 질질 끌며 땅바닥만 바라보는 모습이 안타깝기만 합니다. 당장 문을 열고 달려가서 너의 내일은 분명 밝다고, 마냥 밝으니까 눈을 감지만 않으면 된다고 말하고 싶었는데 몸이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그 짧은 몇 마디가 나와 사뭇 다른 색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나의 색은 아무 곳에도 소용될 수 없는 진한 회색입니다.

3
건너편에서 쉬지 않고 진동벨이 울립니다. 주변에 사람은 없습니다. 이제는 지칠 법도 한데, 진동벨은 사정없이 테이블을 흔들면서 점점 귀퉁이로 밀려납니다. 아, 저러다가 곧 떨어질 텐데…. 그때 누군가 진동벨을 부여잡았습니다. 옆자리에 앉아있던 할머니였습니다. 별일도 아닌데 오늘은 유난히도 심장이 쿵쿵 뛰었습니다. 다시 보고 있던 책으로 눈길을 돌렸습니다. 한 3페이지쯤 읽었을까, 인기척이 느껴져서 주위를 살폈습니다. 이제야 테이블로 사람이 돌아왔습니다. 잠시 어리둥절하던 그는 다시 카운터로 발길을 옮깁니다. 그때 또 한 번 진동벨이 울리기 시작합니다. 자꾸만 어긋나는 타이밍에 내 마음이 다 먹먹해집니다.

4
누군가 문을 열고 들어왔습니다. 그녀와 너무나도 닮아있는 뒷모습에 흠칫 놀라고 말았습니다. 또 한 번 심장이 두근대기 시작합니다. 애틋함보다는 쓰라림인 것 같습니다. 놀란 마음에 책갈피도 하지 않은 채 책을 덮고 말았습니다. 다시 정신을 차리고 책장을 이리저리 들춰봅니다. 옆 테이블에서 의자 끄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혹시나 해서 고개를 들었는데, 그 사람이었습니다. 끝없는 바닥으로 무언가 '툭'하고 떨어지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손에 땀이 나도록 책장을 꽉 부여잡고 멀쩡한 척 딴청을 피웠습니다. 양손이 모두 저릿한 것을 보니 시간이 어지간히 흘렀나 봅니다. 그제야 천천히 고개를 들었습니다. 아까 마주쳤던 사람들은 한 명도 남아있지 않았고 하늘은 어느새 빨갛게 물들고 있었습니다.

5
서둘러 카페를 나와서 하염없이 거리를 걸었습니다. 온몸에 힘이 풀려 고개는 자꾸만 바닥으로 향합니다. 문득 아까 훔쳐봤던 아이가 떠올랐습니다. 느끼는 감정은 다르겠지만, 어깨에 놓인 무게는 서로 비슷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리고 나처럼 누군가 똑같이 내 모습을 쳐다보고 있으면 어떡하나, 쓸데없는 걱정이 들어서 허리를 쫙 폈습니다. 나를 비웃기라도 하는 듯 머리 위로 비구름이 몰려듭니다.

6
마침내 비가 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몰아치는 바람과 떨어지는 빗물에 팔다리가 오들오들 떨렸지만, 어디 숨거나 우산을 꺼내 쓸 생각은 없습니다. 아까 마신 커피가 아직 덜 가셨는지 입안은 쓴맛으로 가득 찼습니다. 소리가 밖으로 새어 나올 정도로 '꼴딱'침을 삼켰습니다. 길 건너에는 우산 하나를 사이좋게 나눠 쓴 한 쌍이 지나갑니다. 반대 방향으로 가면 참 좋으련만, 하필 같은 방향으로 걷고 있습니다. 이럴 때 보면 세상은 너무 잔혹한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7
나도 모르게, 마주한 첫 골목으로 들어갔습니다. 분명 더 느린 길인 것을 잘 알지만, 어두컴컴한 골목이 나를 빨아들이는 바람에 정신을 차려보니 이미 골목 안입니다. 저 멀리 보이는 네온사인을 따라 천천히 걸었습니다. 인제 보니 비가 조금 멎은 것 같기도 합니다. 언제나 그랬듯, 곧장 가는 길을 놔두고 느리게 돌아가는 길을 선택했습니다. 온몸에 힘이 다 빠졌고 옷은 위아래 할 것 없이 벌써 젖었습니다. 오늘따라 유독 무거운 문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창문이 열려있는 건지 방안으로 끈적한 바람이 몰아칩니다. 뛰어들어가서 창문을 닫을까 하다가, 이미 늦었는데 지금 와서 내가 뭘 할 수 있겠느냐고 생각하며 화장실로 들어갔습니다.

8
천천히 씻고 나와 창문을 닫았습니다. 흥건히 젖은 바닥을 닦고 습기를 빼내려 에어컨을 틀었습니다. 싸늘한 바람이 또 한 번 내 주변을 휘감습니다. 젖은 옷을 빨래 바구니에 넣고 가방에 물기를 대충 털어냈습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지퍼를 열어보니 책 두 권이 모두 물에 흠뻑 젖어있습니다. 말려봐야 다시 읽을 수는 없을 것 같아 대충 말아서 쓰레기통에 던져 넣었습니다. 두 권 다 아직 결말을 보지는 못했지만, 오히려 그편이 더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9
냉장고는 텅 비어있습니다. 사실 며칠 전부터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았는데, 습관처럼 냉장고 손잡이를 잡아당긴 모양입니다. 지금 음식을 주문해봐야 배달이 올 때까지 깨어있지 못할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곧장 불을 끄고 침대에 누웠습니다. 빗방울이 다시 굵어졌는지 창문이 요란하게도 울려옵니다. 차라리 비가 평생 멈추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쨍한 하늘이 순식간에 비구름으로 뒤덮이는 모습을 다시는 견디기는 어려울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멈추지 마라, 멈추지 마라…, 속으로 한참 되뇌고 있으니 눈이 스르르 감깁니다. 오늘도 끝이 났나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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