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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상우 Aug 02. 2018

우리집의 새로운 권력관계

아내와 나는 부부 외교관이다. 외교부에서 일하다가 눈이 맞아서 결혼했는데, 아이가 태어나기 전까지는 대체로 서로의 전문 영역을 존중하면서 가사분담을 균등하게 하는 편이었다. 정확히는 둘 다 공평하게 안 했다는 표현이 맞겠다. 어차피 평일에는 둘 다 야근 때문에 집에서 밥을 먹는 일이 거의 없었고, 주말에는 한 번씩 양가를 왔다 갔다 하다 보면 요리를 할 일이 거의 없었다. 


기껏 한다는 요리가 계란 후라이나 냉동 만두 굽는 것이라 우리끼리 ‘올드 보이’ 찍고 있다는 농담을 하기도 했다. 집 안 청소는 계속 버티다가 못 참는 쪽이 했지만 둘 다 버티기의 달인이라 바닥에 먼지가 회오리쳐 돌아다니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었다. 


그런 식으로 지내다가 애가 태어나니까 생활이 완전히 달라졌다. 내가 아내에게 육아 독박을 씌우겠다고 작정한 것은 아니지만, 어쩌다 보니까 아내가 일방적으로 희생하는 전형적인 한국 가정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첫째, 둘째가 태어날 때 아내만 연달아서 육아휴직을 썼다. 아내가 복직한 뒤에는 애들을 어린이집에 보내고, 집안일은 이모님을 섭외해서 도움을 받았다. 


아내는 계속 야근이 별로 없는 소위 비인기 부서에 자원하고(같은 월급을 받고 야근이 없는 과가 더 인기가 많을 것 같은데 그 반대라는 것이 아이러니하기는 하지만, 그게 바로 한국이 ‘일 중심 사회’라는 증거가 아닐까) 일이 끝나면 부리나케 집에 돌아와서 애들을 챙겼다. 나는 바쁘다는 핑계(실제로 많이 바쁘기도 했지만)로 집에 제시간에 들어와 본 적이 거의 없었다. 


이렇게 다른 보통의 대한민국 아빠처럼 나는 가정보다는 사회생활에 더 충실한 삶을 자의 반 타의 반 살았고, 사회에서 성장할수록 집안에서의 내 입지는 더 좁아졌다. 아내가 일방적으로 희생하고 있는 만큼 집안 대소사와 관련된 사항, 특히 애들과 관련된 사항에 대해서는 아내의 의견을 무조건 존중했다. 한마디로 아내에게 종속된 권력관계를 운명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던 권력관계가 스위스에 와서 단번에 역전되었다. 애들에 대한 일차적 양육 책임자인 주부가 되니까 애들과 관련된 모든 최종적인 결정은 옳든 그르든 간에 내가 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나의 우월적인 지위를 아내는 아무런 저항 없이 받아들였다. 아니 오히려 퇴근해서 집에 오면 내 눈치를 조금씩 살피기 시작했다.  세상에서 가장 당찬 아내 톱 3 에 들 정도인 내 아내가 나의 눈치를 보는 날이 올 줄은 꿈에도 생각을 못 하였다. 


서울에서 아이들에게 스위스 가면 엄마만 일하고 아빠가 밥하고 너희를 돌봐줄 것이라고 이야기했을 때 의외로 별다른 거부 반응 없이 받아들였다. 애들이 만 3살, 6살이어서 이게 정확히 무슨 의미인지 잘 이해하지 못한 탓인 것 같기도 했다. 실제 스위스에 와서 주부 생활을 시작하니까 처음 며칠은 엄마를 찾았으나 이내 아빠가 집에 같이 있다는 것에 금방 익숙해졌다. 애들 입장에서는 스위스에 오니까 집안일 도와주시던 이모님 대신 아빠가 밥해주고 놀아주니까 더 좋아했다. 


주부로 변신하니까 고달픈 몸과는 달리 집안에서 나의 입지가 단번에 향상되어서 초반에는 정신적으로 상당히 고무되었다. 특히 아내는 퇴근해서 집에 들어오는 순간부터 나한테 엄청난 찬사를 늘어놓았다. “우리 여보 온종일 얼마나 힘들었어.”, “우리 남편 같은 사람 없지. 우리 남편이 최고야~”, “와~ 이 요리 너무나 맛있다. 완전 맛집이다, 맛집!”, “내 평생 이렇게 맛있는 음식은 처음 먹어봐.” 등등. 


지나고 보니 이 모든 것이 고도의 심리전이었다. 아내는 내가 처음에 몇 주 주부로 지내다가 도저히 못 하겠다고 백기를 들까 봐 노심초사했던 것이다. 어쨌든 아내의 계획은 성공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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