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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소심한 나와 검도장의 나날 1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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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소 Jan 13. 2019

취미형 인간

저는 좋아하는 걸 진지하게 해요

검도를 진지하게 하시나봐요.

도장에서 토요일 수련을 하던 때가 있었다. 정규수련 시간인 주중과 달리 도장에 등록하지 않는 사람들도 올 수 있는 오픈수련 시간이었다. 덕분에 종종 외부 사람들이 호구를 들고 찾아왔다. 모인 사람이 다르다보니 경험할 수 있는 대련 스타일도 퍽 다양해서, 주말에 도장을 가면 한 주에 두 도장을 다니는 기분이 되곤 했다.

주말 수련자들이 보기에 왠만하면 토요일에 안 빠지는 내가 신기했나보다. 어떤 분이 나에게 “검도를 진지하게 하시나봐요” 라고 말했는데 듣는 나는 그 말이 퍽 쑥쓰러웠다. 과하게 좋아하는 걸로 보였으려나. 검도가 밥줄이 아닌데 열심히 해서 그런가. 주말에 호구를 들고 운동을 오는 그분들의 열정도 만만치 않은데 말이다. 사실 타인은 어쩌다가 한 마디씩 말을 던지고 사라질 뿐, 타인에 대해 얼마나 관심이 있다고. 어떤 욕구를 드러내는 마음이 매번 부끄러웠다.

내가 열정의 기준으로 삼는 사람들이 있다. 도장에 자주 나와 내게 진지한 수련 조언을 해주는 남자선배들, 곁에 있지는 않지만 매년 대회를 나가며 시합장에서 꾸준히 봐온 언니들이다. 일상생활에서 가까이 지내지는 않지만 대회를 통해 그 특유의 박력과 기합을 보면서 “나도 언젠가 저렇게 되어야지" 하고 생각해버린다. 파이팅 넘치는 기합과 강한 힘, 거기에 세월이 더해진 노련한 기술. 시합장에 가면 실력으로 승부사 역할을 해내는 언니들. 그들을 생각하면 내가 표현하는 진지함의 정도는 한참 먼 것 같은데. 세월이 야금야금 흘러 나도 언니들의 나이대가 되버렸다. 어째 맹렬한 언니는 못 되고 맹탕이 된 기분이다.

여자부 시합을 유심히 보지 않는 사람들이라면, 그들 눈에는 내가 수련에 대한 의욕이 유달리 높아보였을 수도 있겠다. 검도하는 여성은 그 자체가 적다. 그 중 시합에 꾸준한 열정을 갖고 나갈만큼 노력하는 사람은 더 적다. 그래도 진지하게 대하고 싶은 뭔가를 만나는 것. 그 마음에 충실해지는 게 특이함으로 연결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진심으로 좋아하고 진지해지는 일. 좋은 일이면서 동시에 드문일이라고 느끼니까. 이런 진지함이 생계 일에서 발휘되면 좋았겠지만... 마음이라는 게 마음대로 ‘이거 좋아하자' 하면 바로 푹 빠지게 되질 않는다. 퇴근만큼은 빨리 하고 싶었지만 말이다.

그렇게 나는 때로 검도를 진지하게 했다. 이유는 잘 모르겠다. “이걸 할 때의 나 자신이 좋아서요.” 이유를 굳이 설명하자면 이 말 밖에 할 게 없었다. “시합을 나가는 게 돈이 되는 것도 아닌데 열심히 나가네." 호구가방과 죽도를 주섬주섬 들고 길을 나서는 나를 보며 했던 가족들의 말도 있다. 들인 노력 대비 돌아오는 게 없는 상황을 자발적으로 수행하는 나. 사실 남이 나를 어떻게 볼지 꽤나 신경쓰는 사람이지만, 좋아하는 것 앞에서는 결국 바깥의 시선보다 결국 자기 욕구를 우선해버리고 만다. 좋아하는 뭔가를 마주할 때의 자신을 보면 뼛속까지 ‘취미형 인간’ 같다.

나아가 나의 취미는 햇수가 더해지며 그저 즐기는 경계를 넘어서려 하고 있다. 4단을 넘어 5단심사를 준비할 시기가 온 것이다. 승단을 위해서는 일종의 연수인 강습회에 참여해 검도 이론과 실기에 대한 여러 수업을 받았다. 이렇긴 해도 종종 소심함이 다시 고개를 든다. “5단 승단에 도전해보고 싶어서요." 이 말을 다른 사람들이 들으면 뭐라고 생각할까(또 주눅든다). 승단한다고 도장을 차린다거나 선수를 할 것도 아닌데. 뭐하러 승단하냐고 생각하면 어쩌지. 무엇보다 검도 4단도 잘 못 보는 상황에서 검도 5단인 여자는 어쩌다 가는 시합장이나 강습회 같은 데서만 보는 존재였다. 여자 5단. 내가 되려 하는 것은 어쩌면 유니콘처럼 상상의 동물 같았다.

어느새 나는 마음 한켠에서 이런 식으로 중얼거렸다. “5단? 주변에서 5단인 사람 잘 못 봤어. 생활체육지도자 자격증? 그거 체대생만 하는 거 아냐? 시대회 입상? 그건 투지 좋은 사람만 가능하지 않을까?” 습관적으로 튀어나오는 변명의 목소리. 도전에 실패하더라도 자기를 방어할 수 있는, 그런 말들이 마음속에서 떠돌았다.

그런 면에서 시합장에서 몇 번 만난 인연으로 서로 알게 된, 나보다 다섯 살 어린 여자분은 나에게 멋진 선생님이었다. “혹시 생활스포츠지도사 자격증 공부할 생각 있어요?” 라고 물으면 나처럼 머뭇거리지 않고 바로 돌아오는 “네"라는 대답. 그 친구는 자신이 뭔가를 하고 싶다고 표현하는 데 거침이 없었다. 난 뭔가를 하고 싶다고 분명하게 말하기가 쑥쓰러웠는데. 게다가 말만 분명한 게 아니라 대련하는 스타일도 시원시원했던 그 친구. 울산에서 사는 이 친구가 하루 날을 잡고 토요일 오픈수련의 날 도장에 놀러와서는 엄청난 기세로 왠만한 남자선배들을 제압했다. 그날의 그 친구는 흔한 관용구 표현 그 자체로 정말 ‘날아’ 다녔다.

도장깨기를 당하는 입장인데도 기분이 나쁘기는커녕 막힌 가슴이 시원하게 뚫린 기분. 저렇게 마음껏 강할 수 있구나. 시원시원하게 표현해도 되는구나. 자기 생각을 선명하게 말해도 되는구나. 좋아한다, 하고 싶다는 마음에 쑥쓰러하지 않아도 되는구나. 그 친구를 보고 나의 도전 욕구를 말하는 데 대한 주저함이 많이 약해졌다.

아니, 사실 약해졌다기 보다, 마음 한켠에서 그런 마음을 표현하는 데 몇 번의 연습을 거쳐 조금씩 내뱉는다. 그리고 그 내뱉음이 조금씩 자연스러워지고 있다.

“저의 올해 목표는 5단 승단입니다.” “가능하다면 생활체육지도사 자격증이나 사범자격시험도 응시해볼 생각입니다." 처음 말할 때는 쑥스럽고, 그 다음에는 조금씩 자연스러워진다. 사실 타인은 내가 뭘 하던 말던 그렇게 관심이 없다. 결국 중요하게 남는 건 나의 욕구와 실행뿐일테니까.

앞으로의 내가 어떻게 변할지는 모르겠다. 일단 지금의 나는 좋아하는 뭔가에 진지해지는 취미형 인간임에 분명해 보인다. 아닌 척을 해봤자 속앓이하고 병만 생기더라.

그러니까, 예. 저는 검도를 진지하게 하는 것 같아요.

좋아하는 마음에 힘껏 진지해져볼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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