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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소 Jan 13. 2019

시합장 바깥에서 우는 사람

말하고 싶다. 당신은 이미 잘 하고 있다고


“여기서 이러시면 안돼요.”


지난 가을에 출전한 대회 현장에서였다. 누군가의 단호한, 그러면서도 다독이는 듯한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아 보니 한 여자분이 호면을 벗은 채 울고 있었다. 심판 복장을 한 다른 여자분이 훌쩍거리는 그 사람 옆을 지켰다. 여자분이 소속된 도장의 관장님 같았다.


다른 사람의 모습이면서 동시에 어느 시점의 나이기도 했던, 그 우는 모습. 순식간에 감정이입됐다. 지고 나왔구나. 긴장하면 몸이 마음대로 움직여지지 않으니까. 시도하고 싶은 공격을 제대로 해내지 못 했나보다. 어떨 때는 긴장만 안 했다면 충분히 이길 수 있는 상대에게 지고 왔던 나. 그럴 때는 마음처럼 따라주지 않는 몸이 원망스러웠다. 다 큰 2~30대 여성이면서 이제 막 학교에 들어간 어린이처럼 씩씩 거리며 곧잘 울었다.


마인드 컨트롤한다고 자신만만하게 시합장 입구까지는 간다. 그래 좋다. 허리춤에 칼을 찼다가 뽑아든 그 순간까지도 나쁘지 않아. 하지만 “시작!"을 알리는 주임심판의 외침이 신호탄이 되어 몸의 어딘가에 숨어 있던 긴장감이 용솟음친다. 그렇게 쫄보는 호구를 쓰고 죽도를 쥔 채 긴장감 넘치고 피튀기는 시합이 아니라, 몸이 나무토막처럼 빳빳하게 굳은 채 상대가 공격하는 순간 ‘으악' 하고 맞아버리는 얼음땡 놀이를 하게 되는데...


아, 매번 패배의 순간을 되새김질하면 속상하다. 왜 그랬을까. 차라리 뭐라도 쳐보지. 진다고 지구가 멸망하지도 않는데. 내 통장에 있는 돈이 증발하는 것도 아닌데. 물론 속상하고 화난 마음에 평소에 마시던 커피를 아메리카노에서 바닐라라떼로 업그레이드할 수는 있지만. 음.. 지구 멸망은 아니겠지만 통장 잔고는 줄어들 수 있겠다.


아무튼 지면 그렇게 속상할 수가 없다. 시합 서포트를 하러 와준 애인은 나를 차에 태워가며 농담으로 나를 진정시켜보지만, 농담 소재가 나의 진 시합인 탓에 피 튀기는 결투가 시합장이 아닌 차 안에서 생기는 부작용이 벌어진다.


개인전에서는 이러나 저러나 혼자 분하고 말 수 있지. 단체전에서 긴장감 때문에 지고 나오면 좀더 입체적인 상황이 펼쳐지곤 했다. 일단 주변에서 귀에 쏙쏙 꽂히는 피드백이 날아든다. “왜 도장에서 하는 만큼 못했어?”  “너 때문에 안 되는 시간 쪼개서 시합 나왔는데 졌잖아.” 책망이 담긴 모진 말들. 긴장감에 속수무책이었던 나는 내가 잘못했는지 상대들의 말이 너무한 것인지 분간이 안 됐다.


그래, 이건 내 잘못이다. 내가 실점을 막아야 했는데 제 역할을 못 한거야. 전화를 해서 따로 말을 건넨 적도 있다. “죄송해요. 제가 그때 너무 긴장하면 안 됐던 건데, 제가 제 역할을 했어야 했는데 해내질 못 했네요.” 지금 생각하면 좀 억울하다. 시합장에서 반칙을 한 것도 아니고, 우리가 시합 성적으로 밥벌이를 하는 선수도 아닌 것을. 우리는 좋아하는 운동을 즐겁게 해나가는 일개 아마추어 검도인일 뿐이다.


나중에 “걔 시합을 못 한다"라는 말이 건너 듣고 더 화가 났던 슬픈 기억도 떠오른다. 그 이후로 시합 경험을 쌓으려고 아득바득 시간내어 각종 구 대회 시합을 챙겼던 기억들이 새록새록 떠오르고.. 그리하여 이 분노가 나중에 시 대회 개인전 입상으로 이어진다는 사실이 신기하지만. 그래도 그렇지. 다독여주면 좋잖아요. 뭘 하던 고생했으니 “수고했어. 고생했어" 하고 격려하는 거. 너무 당연하잖아요.


시합 성과가 좋으면 기쁜 거 나도 안다. 우승기 혹은 입상 트로피를 옆에 끼고 단체사진을 찍는 모습. 그 자신만만한 표정과 몸짓으로 한껏 승리의 기쁨을 드러낸 사진을 찍는다니. 다른 도장의 단체 팀들이 그렇게 사진 찍는 걸 볼 때마다 부럽고 멋져 보였다. 그래도 단체전의 본질은 ‘함께 한다'는 사실 자체가 아닐까. 시합장에서 승리라는 공동의 목적을 두고 함께 경험을 쌓는 자체가 즐거움인 것을. 그렇다면 도전하는 시합의 결과가 실패여도 괜찮잖아.


나는 때로 이해관계가 얽히지 않은 공간에서 서로 챙겨주고 지지하는 마음이 무리 없이 일어나는 순간을 상상한다. 내게는 그런 가능성이 현실로 될 거라 기대하게 하는 게 시합이다. 회사생활을 할 때는 실수할까봐 긴장감이 떠나지 않는다. 마음 한켠이 항상 쪼그라져 있다. 그런 곳에서 타인이란 언제든 나를 평가하거나 질책하거나 궁지에 몰 수 있는 사람. 팀워크를 느낄 수 있는 존재는 아니다.


지지와 격려의 팀워크를 찐하게 경험한 적은 별로 없지만, 그래도 항상 다짐하는 태도가 있다. 누군가와 함께 할 기회가 생기면 옆의 사람에게 잘 해줄 거다. 시합 때 서로의 실수를 질책하지 않겠다. 시도 자체로 응원하겠다. 어떤 상황이 됐든 내 옆에 함께 뛰어주는 사람이 있다면 지지의 말을 꼭 건내겠다.


무엇보다 나 자신이 자꾸 시합에 나가서 지다 보니 알겠더라. 나보다 월등한 실력을 지닌 이 앞에서 서 있는 것도, 혹은 나와 비등한 상대와 시합하는 과정도 모두 만만치 않다는 걸. 시합시간 3분 동안 각자 자신의 두려움과 마주하며 여러 공격을 시도하는 자체로 이미 멋지다. 우리는 행동하는 그 자체로 이미 멋진 사람임을 자꾸 잊는다.


다시, 울고 있던 여자분의 모습으로 돌아가본다. 본인 마음대로 안 풀려서일수도, 아니면 너무 긴장해서 당황했을 수도. 이유는 제각각이겠지만 이 말을 해주고 싶었다.


“당신은 이미 대단해요. 대회를 나올 정도라면 생업이나 집안일 등등, 일상의 여러 일에 치이면서 어떻게든 연습할 시간을 냈겠죠.  대회 당일에는 그 무거운 호구와 죽도 등 장비를 들고 시합장까지 왔겠죠. 몸은 지치고 긴장감은 가득하고, 그런 가운데 시합장 한 가운데로 성큼성큼 걸어들어가 칼을 뽑아들었을 거잖아요.


뭔가를 도전하고 그 도전에 기꺼이 자신을 던진 당신. 그 자체로 이미 훌륭해요. 진심으로 하는 말이에요. 당신은, 나는, 우리는 이미 대단해요. 그 사실을 한번 믿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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