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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골짜기 혜원 Nov 05. 2021

이 작고도 매웠던 삶의 무게를

산골짜기 고춧가루 인생 

여름부터 시월 가을이 되기까지 

가장 열심히 한 일이 있다면

아마도, 고추 말리기.


여느 해와 다름없이 텃밭에 

그리 많지 않은 고추를 심었고,

비가 엄청 온 지난해와는 달리

올해는 열매가 솔찬히 열렸다. 


비가 엄청 온 지난해는 고추 농사가 정말 잘 안 됐는데, 올해는 열매가 솔찬히 열렸다.


언제 익었는지도 모르고 지내다가

어느 날, 옆지기가 

빨갛게 익은 고추를 따서 마당에 널더라. 

8월 중순쯤이었을까. 


‘올 것이 왔구나....’ 


입을 앙다물었다.


‘말리다가는 반 넘게 썩어 버렸던 태양초,

올해만큼은 제대로 해 보고 싶어.  

잘된다 해도 김장에 쓸 양은 턱없이 모자라겠지만, 

무작정 되게끔 해 보자.

되는 경험을 한 번이라도 만들어 보자!’ 


고추밭 일구면서 

그 질긴 풀을 매고 또 맸던 시간들,

고추 모종을 심은 뒤로

하염없이 올라오는 잡초를

뽑고 또 뽑던 순간들. 

허투루 만들고 싶지 않았다.

정말이지 이번만큼은. 


고추가 잘 마르도록 가위로 반 가르는 일, 매운 내음에 재채기는 이어지고 손에 고추 물까지 묻어 손도 어찌나 아프던지.


꼭지를 따고 가위로 가른 고추들을 

해님 아래 널고 또 널었다. 

장갑을 끼고 하는데도 정말 맵기만 했다.   

눈물이 많이도 났다. 


얼마 안 되는 고추를 매만진 뒤에는

세수도 맘대로 하지 못했다.

실수로 눈언저리에 손을 댔다가

눈이 너무너무 아파서  

또 많이 눈물이 났더랬다.


속이 아파서 나는 눈물보다는

그저 견딜 만했다. 

그렇게 울 수 있어서

좋기도 했다. 


그래도 서럽긴 했다.

뜨거운 여름 햇살 아래

지독히 매운 고추를 만지는 일은. 


꼭지를 따고 가위로 가른 고추들을 해님 아래 널고 또 널었다.


비가 여러 날 와서 

잘 마르던 고추가 물러질 때면

건조기 욕심이 나기도 했다.

우리한텐 큰돈이다 보니 

지를 자신이 없었다. 

기계 힘을 빌릴 만큼 

양이 많은 것도 아니었고.


하늘에 계신 엄마 생각이 많이 났다.

가락시장에서 고추를 사다가

옥상에서 말리던 엄마.


고추를 가위로 자르는 일도 

정말 하기 싫었고,

비라도 오면 온 집안에 

고추가 좌르륵 자리 잡는 것도 마땅찮았다.

매운 내 가득한 집을

까치발 들고 종종거리며 다녀야 했으니까.


고추를 말리면서 하늘에 계신 엄마 생각이 많이 났다. 태양초를 참 잘 만드셨던 울 엄마가.


그때가 자꾸만 떠오르면서 

엄마는 태양초를 잘 만드셨는데

도시에서 그게 어찌 가능했는지,

내가 지금 이러고 사는 게 정말 잘하는 건지

계속 이렇게 살아도 괜찮은 건지

궁금하기만 했다, 묻고만 싶었다. 

고추를 따고 말리던 그 모든 순간순간에.


8월부터 두 달 넘게 이어진 

산골 고춧가루 인생.


해냈다.

빨갛게 탱탱한 고추들을

구십 퍼센트 가까이

바짝 마른 태양초로 살려냈다. 


빨갛게 탱탱한 고추들을 구십 퍼센트 가까이 바짝 마른 태양초로 살려냈다.


그것들을 어루만질 때면

잘 마른 고추와 고추씨가 어우러져 

귀에 음악이 울려 퍼졌다. 


‘사라락 사그라락~ 차라락 차그라락~♪’


이 소리, 이 감각 정말 아름답지 않은가!

고추와 함께한 시간들이

사라락 녹아내리면서 감격에 겨웠다.


드디어 ‘되는 경험’을 만들었구나, 나도 할 수 있구나.... 


모두 13봉지였다.

익을 때마다 거두어서 말린 태양초.


열세 번을, 그보다 더 많은 횟수를

고추만 바라보며 애면글면했던 시간들이

작은 봉지마다 오롯이 녹아 있다.   


산골 태양초 열세 봉지마다에 스민 땀과 눈물이 아련하기만 하다.


방앗간에서 받아 줄 양이 못 되겠기에

믹서기에 갈기로 결심! 

그동안 갈무리한 태양초를 

다시 한 번 햇볕 아래 널었다.


이틀을 더 말리고 

하루를 죄 갈았다. 


거의가 청양고추다 보니 

가루를 내는 일은 

말리기보다 훨씬 매웠다. 


콧물 닦아 낸 휴지가 수북하고,

눈물은 끝도 없이 흐르고 또 흘렀다.

마스크는 기본으로 쓰고

눈이 지나치게 아파서 급기야

선글라스까지 껴야 했다. 


‘고춧가루 맵다 한들 
산골살이보다 더 매우랴.
고추가 건강에 엄청 좋다니까
그 덕에 흘린 눈물 콧물은
분명 몸과 마음에도 좋을 거야.
마음껏 풀고 또 흘리자,
마음속 응어리까지도 함께.’


아.... 드디어 끝!

고추는 작고, 씨까지 있다 보니

막 빨갛지는 않지만

내 눈엔 세상에서 가장 곱고 어여쁜 

산골 고춧가루를 보고 또 본다.



바라보기만 해도 ‘엣취!’가 연달아 터지니

방앗간에서 고춧가루 빻아 주시는

모든 노동자들께 깊은 존경심이

마구마구 일어나는구나. 


그렇게 산골에 살면서 처음으로

고춧가루를 만들었다. 

모두 해서 2킬로 500그램.


잊지 못할 것이다,

잊지 않고 간직할 것이다.


산골 부부가 고추와 더불어 

땅과 하늘, 자연과 함께 일군

이 작고도 매웠던 삶의 무게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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