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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골짜기 혜원 Oct 06. 2018

고구마순 다듬는 남자
고구마순김치 담그는 여자

올해 마지막으로 만나는 고구마순에 대한 마지막 예의 


보통 고구마순김치는 한여름에 많이 담그지요. 이때가 고구마순이 통통하고 싱싱해서 가장 맛있거든요. 더 지나면 순이 질겨져서 김치로도 볶음으로도 만들어 먹기에 적당하지가 않아요.


한데 올해는 좀 달랐어요. 뜨거운 폭염으로 고구마순도 다른 해보다 천천히, 느리게 자랐죠. 지난해만 해도 8월 중순께 고구마순 열심히 뜯어다 볶아도 먹고 김치도 만들고 했거든요. 하지만 이번 여름은 가늘고 힘없이 자라는 고구마순을 애처롭게 바라보기만 했답니다.


차분히 앉아서 고구마순을 다듬다 보면 저절로 마음 수양이 된다는 한 남자. 가을 들어 통통하게 살 오른 텃밭 고구마순을 다듬고 또 다듬습니다. 


그러다 가을을 알리는 9월이 찾아왔어요. 역시, 자연은 놀라워요! 뒤늦게나마 고구마순이 길쭉하게 제 모습을 갖추기 시작하네요. 그러자 가장 먼저 고구마밭으로 나서는 이가 있었죠. 바로 저랑 함께 사는 남자예요. 고구마가 실하게 자라는 데 방해가 되지 않을 만큼만 순을 뜯어 오더니 바로 다듬기 시작합니다. 


고구마순 다듬어 본 분들은 알 테지만 손이 정말 많이 가요. 순 하나하나 껍질을 벗겨 내야 하거든요. 허리는 아프지, 손가락은 검게 물들지, 진도는 빨리빨리 안 나가지. 산골 살면서 나물 갈무리를 어느만큼은 해 봤지만 그 가운데 고구마순 다듬기가 가장 힘든 일 같아요. 그러다 보니 웬만하면 피하고만 싶었죠. 정말 징하고 징한 노동이거든요. 


그런데 이 남자는 저랑 좀 다르더군요. 차분히 앉아서 고구마순을 다듬다 보면 저절로 마음 수양이 된다나요? 또 이이는 손전화로 이런저런 뉴스나 마음에 양식이 될 영상 보는 걸 좋아하거든요. 고구마순 다듬으면서 그런 영상을 같이 보는 시간도 참 좋대요. 그 말이 참말인지, 저한테 딱히 같이 하자는 말을 건네지 않네요. 그러곤 두어 시간 넘도록 혼자 그렇게 고구마순과 함께 앉아 있어요. 그러기를 한 번 또 한 번, 가을 들어 서너 차례 넘게 이어졌죠. 

 

허리는 아프지, 손가락은 검게 물들지, 진도는 빨리빨리 안 나가지. 산골 살면서 나물 갈무리를 어느만큼은 해 봤지만 그 가운데 고구마순 다듬기가 가장 힘든 일 같아요.


저는 그 모습을 흐뭇한 눈으로 지켜보다가, 다 다듬은 고구마순을 내밀면 얌체같이 받아 들어요. 그러곤 요리를 하죠. 고구마순으로 음식 만들기는 저도 좋아하거든요. 먹는 것도 물론이고요. 


어떤 날은 그렇게 고이 다듬은 고구마순을 생각만 해도 참 고마운 한 선생님께 싹 보내드리기도 했어요. 그랬더니 생전 처음 해 본 고구마순볶음이 사각사각 너무 맛있다며 사진까지 찍어서 보내주셨더라고요. 


텃밭 일에 게으른 저를 잘 아시는지, 고구마 다듬느라 애쓴 남자에게 고맙다고 인사 전해 달라는 말씀까지 주시네요. 천리안이 따로 없었답니다. 그렇게 간간이 뜯어서 볶아도 먹고 선물도 드리고 했던 고구마순 덕분에 이 가을이 그 맛처럼 구수하게 푸근했어요. 


고이 다듬은 고구마순을 참 고마운 한 선생님께 보내드렸어요. 그랬더니 생전 처음 해 본 고구마순볶음이 사각사각 너무 맛있다며 사진까지 찍어 보내주셨죠.


그러다 드디어 고구마를 캐야만 하는 시간이 찾아왔어요. 땅속 깊이 보물처럼 간직된 고구마를 캐기 전, 땅 위를 수북이 뒤엎은 고구마순부터 걷어냅니다. 


낫으로 석석 베어 낸, 치렁치렁 늘어진 고구마순 줄기를 붙들고 한 가닥 또 한 가닥 고구마순을 뗍니다. 이번에는 김치를 담글 거랍니다. 마지막 고구마순이 지닌 맛을 오래오래 간직하자면 김치가 딱이니까요. 


낫으로 석석 벤, 치렁치렁 늘어진 고구마순 줄기를 붙들고 한 가닥, 한 가닥 고구마순을 뗍니다. 그러곤 땅 속에 보물처럼 숨겨진 고구마를 설레는 마음으로 캤답니다.


이번에는 저도 껍질 다듬는 일을 함께했어요. 이제 더는 볼 수 없을, 내년 여름까지 기다려야만 만날 수 있는, 올해 마지막 고구마순에 대한 제 마지막 예의를 갖추고자. 오랜만에 한다지만 몇 년 동안 해온 일이라 나름 익숙하네요. 생각보다 힘들지 않아서 그동안 왜 이 일을 피하기만 했나, 슬쩍 아쉽기까지 하더라고요. 


늦은 밤까지 다듬은 고구마순으로 바로 김치 담그기에 들어갑니다. 먼저 고구마순을 데쳐야 해요. 데치지 않고 하면 아무래도 조금 질기더라고요. 연한 연둣빛 때깔이 뜨거운 물과 닿으면서 서서히 짙게 바뀝니다. 


아, 고와요. 이 빛깔.
아, 구수해요. 고구마 맛을 닮은 이 내음.  

연한 연둣빛 때깔이 뜨거운 물과 닿으면서 서서히 짙게 바뀝니다. 아, 고와요. 이 빛깔. 참말로 구수해요. 고구마순에서 풍기는 고구마 맛을 닮은 내음이!


오로지 감에 맡겨 적당히 데친 고구마순을 차가운 물에 여러 번 씻어요. 물기 쪽 뺀 다음 먹기 좋은 크기로 잘라서는 바로 김치 양념 만들기에 들어갑니다. 


배추김치 담글 때랑 비슷해요. 까나리액젓, 새우젓, 고춧가루, 매실액, 파, 마늘, 양파 넣고 슥슥 버무리면 양념 준비 끝! 여기에 썰어 둔 고구마순 확 붓고 슬슬 무쳐 줍니다. 다듬기는 힘들어도 김치 만드는 건 금방이죠. 고구마순 다듬을 때 살짝 힘겹던 제 얼굴도, 고구마순김치 담글 땐 활짝 펴집니다. 


고구마순김치는 말이죠, 만들면서 맛을 봐도 그 맛을 잘 모르겠어요. 할 때마다 그래요. 그러다 보니 이것도 더 넣고, 저것도 더 넣고 그러기 십상이죠. 여하튼, 어찌어찌, 다 만들었어요. 올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만드는 고구마순 김치를! 


다듬기는 힘들어도 김치 만드는 건 금방이죠. 고구마순 다듬을 때 살짝 힘겹던 제 얼굴도, 고구마순김치 담글 땐 그예 활짝 펴집니다.


하루 이틀 지나 조금씩 김치가 익어 가네요. 그리고 맛도 서서히 들고 있어요. 음, 그럭저럭 괜찮은 맛이 나는 거 같아요. 아삭하게 씹히면서 구수한 내음이 묻어나는, 세상 어느 김치도 흉내 낼 수 없는 맛이죠. 오로지 고구마순김치만이 낼 수 있는 바로 그 맛! 이 정도면 다른 이들한테 맛 보여도 막 부끄럽지는 않을 수 있겠어요.


한글날과 이어진 샌드위치 주말에 아주 귀한 산골손님들이 오신답니다. 실은 이 김치를 담글 때 그분들을 생각했어요. 


고구마순김치는 한 번 데쳐서 담그기 때문인지 배추김치보다 빨리 시더라고요. 시기 전까지 저희 부부만 먹기에는 좀 많다 싶은 양이어도 거침없이 김치를 담근 건 바로 곧 찾아올 이 손님들 때문이었죠. 맛은 좀 덜할지라도 땅과 자연이 내준 귀한 고구마순김치를 함께 나눌 사람들이 있기에 더 행복한 마음으로 김치를 만들 수 있었답니다. 


땅과 자연이 내준 귀한 고구마순김치를 함께 나눌 사람들이 있기에 더 행복한 마음으로 김치를 만들 수 있었답니다.


한 밤, 또 한 밤 지나면 만나게 될 소중한 산골손님들이 고구마순김치를 먹으면서, 이 김치가 만들어지기까지 제가 느낀 행복도 같이 맛볼 수 있으면 정말 좋겠어요. 그리고 또…. 고구마순 다듬느라 애쓴, 산골 텃밭을 보듬고 지키는 한 남자의 그 정성 어린 마음까지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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