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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골짜기 혜원 Nov 13. 2018

남의 수확이 내 수확도 되는 철, 가을

얼척없는 텃밭농사 덕분에 달큰한 가을무 김치 담근 날

늦은 아침, 손전화 진동에 잠이 깼다. 손전화를 열어 보니 마을 아주머니 번호다.


‘무슨 일일까?’


가까스로 몸을 일으켜 정신 좀 차리고 전화를 건다. 화이트 거짓말이 필요한 순간.


재택근무(?)하는 사람이다고 배려해서인지 (어쩜, 자고 싶을 때 자고 일어나고 싶을 때 일어나는 내 하루하루를 꿰뚫고 계실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아침에 전화하실 일 있으면 꼭 “일어났어요?” 하고 먼저 묻는 분이다. 


거짓말은 정말 싫지만 이 아줌니한테만은 어쩔 수 없이 더러 하게 된다. 허구한 날 밭에서 허리 굽히고 있는 분께 편히 자고 일어나는 내 참모습을 부끄럽고, 또 죄송하기만 해서 도저히 있는 그대로 밝히지 못하겠으므로. 


마을 아줌니한테 아침 전화를 받고, 세수도 안 한 얼굴로 찾아가니 어린 무시 더미를 두 아름이나 안겨주신다.


“예, 저예요. 전화하셨네요. 화장실에 있느라 못 받았어요.”


“그래요? 난 또 아직 안 일어났나 했지.” 


“아니에요, 벌써 일어났어요.^^”


무시 뽑은 거 있는데 가져가란다. 다 다듬어 놓았으니 김치 담그라며.


“네, 지금 바로 갈게요.”


세수도 안 한 얼굴로 찾아가니 어린 무시 더미를 두 아름이나 안겨주신다.


“이렇게나 많이 주셔도 돼요?”


“우린 벌써 담갔어요. 그 집 무시 작아 뵈던디…. 새우젓 넣고 버무리면 맛있어요. 무시 김치는 금방 담가.” 


마을길 보이는 자리에 무시를 심었더니만 아니나 다를까, 무청 자라는 모습만 보고도 벌써 알고 계셨구나. 우리 집 무시가 엄청 작디작다는 걸.  


“네, 고맙습니다!”


두 아름이나 묶어 주신 어린 무시를 어깨에 메고 돌아서려는데 얼른 따라 나오면서 하시는 말씀.


“집에 대파 있어요? 파 넣고 무치면 맛난데.”


“네? 대파, 있어요….”


내 말을 들었는지 말았는지 집 앞 밭에 있는 대파를 또 한 움큼 뽑으신다. 와, 대파 크다. 우리 텃밭 대파는 이거에 견주면 쪽파나 다름없겠네. 대파를 건네주시면서 마지막 한 말씀. 


“설탕 넣으면 질퍽해지니까 미원은 별로고, 당원 좀 넣어요. 그럼 훨씬 맛있어.”


“네에~”


(아주머니가 말씀하시는 저 ‘당원’, 내 짐작으론 ‘뉴슈가’를 말하는 것 같지. 이 마을 살면서 ‘당원’이란 말을 은근히 자주 들었는데, 들을 때마다 기분 묘하다. ‘당원’이란 말은 아무리 여러 번 듣고 또 들어도 저절로 ‘정당’의 ‘당원’으로 연결되니까.^^)     


두 아름 되는 무시들을 무청 질긴 것만 좀 덜어내고 씻고 절인다. 껍질 벗기지 않아도 수세미로 밀어내니 흙은 금세 떨어지고.


어쨌거나 느닷없이 닥친 무시 김치 담그는 일을 앞에 두고 마음이 생각보다 느긋하다. 


안 그래도 총각무, 알타리 이런 거 말고 어린 가을 무시로 김치 한번 해보고 싶었는데 이렇게 기회가 생기니 오히려 기쁘기까지 하고. 더구나 내가 무시를, 무시로 담근 김치를 엄청 좋아하지 않는가! 


두 아름 되는 무시들을 무청 질긴 것만 좀 덜어내고는 씻고 절인다. 껍질 벗기지 않아도 수세미로 밀어내니 흙은 금세 떨어지고. 자, 이제 소금에 절일 시간. 언제나 그렇듯 적당히, 감으로 소금을 치고는 두어 시간쯤 그렇게 놔둔다.


아줌니가 준 대파 썰고 집에 있는 양파도 팍팍 썰고. 마늘 다진 거랑 새우젓, 액젓, 매실액에 고춧가루 팍팍 부어 어린 무시랑 버무린다. 무청까지 섞여 은근히 양이 많다. 앉아서 하기엔 힘이 부치네. 온몸을 던져 무치고 또 무치고!


김장 예행 연습? 무청까지 섞여 은근히 양이 많다. 앉아서 하기엔 힘이 부치네. 온몸을 던져 무치고 또 무치고!


얼추 마무리된 무시 하나 맛을 보는데, 어마나? 하나도 맵지 않고, 달짝지근하니 엄청 맛있는 거라! 꼭 무슨 과일 같아. 당원 넣지 않아도 이렇게 달짝지근한데 왜 그리들 당원, 당원 하시는지 안타까운 마음도 살짝 들더군.


우리도 곧 김장을 할 거인지라 김치가 많이 많이 생길 것이므로 싱겁게 해서 김장 전에 많이 먹으려고 양념도 덜 짜게 하고자 했는데 내 뜻과 내 손맛이 오랜만에 서로 잘 맞아들은 것 같다. 


보통 김치 만들 땐 막걸리가 땡기기 마련인데 오늘은 왠지 소주가 당기는구나. 무시 김치가 꼭 과일안주 같아서는. (소주랑 과일은 서로 궁합이 잘 맞는다는, 예전에 얻어들은 이야기가 있음.) 


저녁밥상에 갓 만든 무시 김치랑 함께 소주잔을 기울여 보니 잘 어울린다, 어울려! 깍두기 하고도, 총각무 하고도, 총각무 하고도 뭔가 확실히 다른, 어린 가을 무시 김치. 달큰하고 아삭한 맛에 이끌려 먹고 또 먹는데 맵지도 않지만, 짜지도 않다.  


얼추 마무리된 무시 하나 맛을 보는데, 어마나? 하나도 맵지 않고, 달짝지근하니 엄청 맛있는 거라! 꼭 무슨 과일 같아.


아무래도 절일 때 소금을 덜 친 것 같네. 맨입에 이리 맛있으면 김치 반찬으론 제 몫을 못하지 않을까, 슬쩍 걱정도 됐지만 냉큼 그 걱정 떨쳐 보낸다. 익으면 간이 들 거고, 혹 싱거우면 그만큼 많이 먹을 수 있으니 간이 들면 든 대로, 덜 들면 덜한 대로 이 가을 무시 김치는 무조건 늦가을 밥상을 행복하게 해 줄 테니까!^^


오랜만에 김치 담그는 노동을 하고 나니 얼마 안 있으면 닥쳐올 김장에 대한 걱정과 두려움이 조금은 덜어지는 기분이다. 김장 예행연습이라도 한 것 같은 느낌. 


이 모든 게 텃밭 무시 덕분이다. 벌레 먹은 망사 이파리 이고 지고 제 딴에는 힘겹게, 열심히 자라고 있다지만 마을 분들 보기엔 얼척 없는 모양새.


“집치 무시라 작아 뵈던디…” 하며, 며칠 전 앞집 할머니가 안겨주신 큰 무시 보따리.


그러고 보니 며칠 전 앞집 할머니께서 큰 무시 한 보따리 안겨주신 게 있네. 김장 속 할 때 쓰면 ‘딱!’이겠더군. 고맙다고, 잘 먹겠다고 말씀드리는 나한테 또 할머니가 하신 말씀이 있지.


“집이 무시가 작아 뵈던디….”


마을 분들께 무시를 나누고픈 열망(?)을 저절로 불러일으킨 작디작은 텃밭 무시. 왜 그런지 지난해보다도 더, 덜 자라서는 깍두기마저도 쉽지 않을 듯해서 죄다 동치미를 만들까 생각 중인데. 


작아 뵈는 텃밭 무시 덕분에 김장 속에 쓸 무시가 조금이나마 생겼고, 처음으로 어린 가을 무시 김치도 담글 수 있었구나. 


남의 수확이 내 수확으로 이어지기도 하는 ‘수확이 넘치는 철’, 이 가을이 참 고맙다. 어린 가을 무시처럼 달큰하게만 느껴지는, 무시에 실려 온 마을 분들의 마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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