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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상락재 Oct 24. 2021

Amor fati

2016년 2월, 월리는 한 달간의 농양 제거를 마치고 퇴원했습니다. 비좁은 간이침대 생활에 두 다리 쭈욱 뻗고 편히 자는 것이 소원이었던 저도 그제야 한숨 돌릴 수 있었지요. 그러나 안도감은 일주일을 채 넘기지 못했습니다. 월리의 관상동맥 협착증이 심각해 급사의 위험이 있다는 안내를 받았기 때문이었지요. 결국 우리는 빠른 시일 내에 심장스텐트 시술을 받기로 결정했습니다. 몸 안에 이물질을 넣는 것도, 평생 피가 굳지 않는 약을 먹어야 하는 것도 마음에 걸렸지만, 개두술을 겪어본 우리는 도저히 개흉술을 할 자신이 없었습니다.


시술 당일, 우리는 짧은 시술시간과 당일 퇴원에 기뻐하며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 때부터였습니다. 월리는 그 후로 극심한 심장 통증에 시달렸고, 밤에도 잠들지 못하는 날들이 이어졌습니다. 급기야 그가 길에서 심장을 움켜쥐고 쓰러지자, 우리는 시술을 담당했던 전문의를 찾아갔습니다. 그러나 그는 일말의 고민도 없이, 월리의 증상은 역류성 식도염 때문이라는 진단을 내렸습니다. 우리 역시 차라리 식도염이길 바랐지만, 하루에 십 수개의 제산제를 먹어도 심장을 쥐어짜는 듯한 고통은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병원 말만 믿고 기다리다가는 큰일이 생기고 말 거라는 생각이 들자, 그제서야 저는 비슷한 사례를 백방으로 알아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알게 되었지요. 심장스텐트 시술 성공률이 그리 높지 않으며, 재시술 비율도 높다는 걸 말입니다. 스텐트 시술만 받으면 씻은 듯이 나을 거라 생각했던 저는 뇌수술만 받으면 금방 좋아질 거라 기대하던 2년 전처럼 여전히 어리석었던 것이지요. 그리고 2014년 6월 이후로 죽음은 줄곧 우리 곁을 맴돌고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생활을 걱정할 때, 우리는 늘 죽음을 걱정해야 했으니까요.

행복에 겨웠던 연애시절, 아빠의 지인이 궁합을 봐주신 적이 있었습니다. 퇴직 후 역술인이 된 아저씨는 이 결혼은 안될 일이라고, 둘 중 하나는 죽을 거라며 한사코 말리셨지요. 재미로 본 궁합에서 그런 말을 듣고나니 마음이 편치 않았습니다. 그러자 그 이야기를 전해들은 월리의 어머니는 오래된 이야기를 꺼내셨습니다. 30년 전, 잘 아는 스님께 월리가 단명하는 사주라는 말을 들으셨다고 말입니다. 행복한 결혼을 꿈꾸던 저는 난생 처음 듣는 섬뜩한 이야기들에 정신이 아득했습니다. 무서운 마음에 몇 날 밤을 설쳤지만, 그런 말 때문에 월리를 잃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잊고 살기로 마음 먹었지요.

그런데 언젠가부터 월리의 목숨을 앗아갈 듯한 일들이 계속해서 생기자, 그 이야기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 다음에는 또 어떤 불행이 닥쳐와서 월리를 죽음으로 몰아갈지 두려웠습니다. '정말 운명이 정해져 있나. 바꿀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모든 것이 정해져 있다면 우리는 왜 꼭두각시 같은 삶을 살아야 하는가' 지난 수 년간 저는 잠시도 이 생각들을 떨치지 못했습니다. 그러면서도 내가 바보같이 월리를 빼앗길 줄 아느냐고 악을 쓰며 버텼지요. 그렇게 긴 시간, 저는 고약한 운명과 싸우는 마음으로 살았습니다.

그랬던 제가 바뀌기 시작한 것은 지난 해 아주 귀한 인연을 만나면서부터였습니다. 그 분이 이런 말씀을 해주셨지요. 생각에는 엄청난 힘이 있어서, 생각하는 대로 인생이 변한다고. 그래서 누구도 미래를 정확하게 예측할 수 없으니, 운명을 찾으려는 노력 대신 생각으로 명을 바꿔나가라고 말입니다. 눈이 번쩍 뜨이는 순간이었지요. 동시에 아찔함을 느꼈습니다. 운명을 바꾸는 것이 내 몫이라면, 천형같던 이 운명 역시 전지전능한 신의 계획이 아니라 내 생각과 감정의 결과물일지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이제는 압니다. 내 생각이 여기서 한 치도 자라지 못하면 평생 내가 만든 운명대로 살게 되리라는 것을요. 그러나 내 생각이 운명을 넘어서면, 그 때부터는 지도에는 없는 길이 펼쳐지겠지요. 그러니 저는 월리와 함께 아주 멀리까지 가보려 합니다. 우리가 만들어 가는 이 생을 아주 열렬히 사랑하면서 말입니다. Amor fat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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