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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위영 Sep 08. 2017

러시아와 마가목



소설가 이순원은 나무를 사랑하고 좋아하는 작가다.

그래서 그의 글에는 숱한 나무들이 등장해서 글을 숲처럼 만들곤 한다.  

그는 수년 전 삿포로에 여행 갔다가 마가목이 가로수로 심어져 있는 것을 봤다고 한다. 

마가목은 그가 대관령 산속에서 보았던 나무였다. 대관령에 살았던 사람이 삿포로에 살아도 저 마가목 때문에 외로움을 견딜 수 있을 거라는....  

그러니까 마가목이 ‘삿포로의 여인’이란 소설의 촉매 작용을 했다는 이야기.    

이번 러시아 여행길에서 마가목은...주황빛 열매를 매단 채 여기저기서 상시 출몰했다.

특히 자작나무 숲에서 살짝 살짝 보이는 마가목은 

마치 여왕의 왕관처럼,...

호암미술관에서 천천히 걸어 다니고 있는 푸른 공작새처럼....

숲을 화려하고 우아하게 만들곤 했다. 

여행 후 피곤하고 나른한... 뭔가 허전한 상태에서

가장 편히 할 수 있는 영화보기를 했다. 

<닥터 지바고>와 이콘화가 <안드레이 류블로프> 타르코프스키의 <거울>

세 영화 다 봤던 영화들

영화관은 아니고..

텔레비전 리모컨에서 돋보기를 찾아 

가령 닥터지바고면 ㄷㅌㅈㅂㄱ 이런 식으로 찾으면 거의 모든 영화가 다 망라된다. 

돈두 엄청 싸다. 1400원  

아, 안드레이 류블로프는 없다. 예전에 다운 받아놓았던 것을 모니터 화면에서 봤고        

<거울>의 첫 장면 

통나무로 만들어진 벽(?)위에 살짝 걸터앉은 여인의 뒷모습은 언제 봐도 매혹적이다. 

영화의 인트로로 제목 못지않게 더없이 좋은 장면이다.  

시가 낭송되고  시적인 화면이 이어지며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운 시점들이 넘나든대도  

영화는 지루하다기 보다는 그저 아름답다.    

파스테르나크의 생가를 다녀와선지 

숲속 가운데 있는 영화 속 집은 파스테르 생가의 분위기와 너무나 흡사했다. 

그 집안으로 앵글이 움직이자 안드레이 류블로프의 이콘....

성삼위일체...가 벽에 걸려 있었다. 

물론 이 장면은 그냥 스쳐 지나가는 아주 짧은 시간이었는데  

전에 볼 때는 전혀 몰랐던 장면이 그리운 사람이라도 되듯 담쑥 안겨왔다.

여행의 묘미ㅡ 물론 지극히 개인적인 나만의ㅡ를 방안에서 절감하던 순간이었다.

그러니까 이런 기분은 

제주도 섭지코지를 가다가 우연히 들른 곳에서  

우도와 하늘과 바다가 한눈에 보이는 뷰~그것도 사람 거의 없어 마치 내것 같은~ 를 발견한 것과 아주 흡사하다.     

러시아 여행중... 여러 곳의  러시아 정교회 예배당을 다니며 

혹시 류블로프? 하며 눈을 밝히 뜨고 목이 빠져라 쳐다 보았지만   

문맹에다가 도무지  눈이 아둔한 사람으로 찾을 수 없었다. 

러시아 정교회의 이콘은 내 눈에 거의 다 비슷해보였다.

갸름한 얼굴의 마리아는 어디서나 청순하면서도 애잔한 아름다움을 풍겼고

얼굴이 풍기는 느낌과는 다르게 색은 짙고 그녀를 치장한 보석들은 화려했다.   

가령 쌩트 페트르부르크의 피의 구세주 성당은 

온 성당 안 모든 작품이 하다못해 창틀까지도 작은 타일로 만든 모자이크 성당이었다.

모자이크 화라고는 믿을 수 없이 정교한 작품들...

그 수많은 작품을 만들어 붙이는 풀에는 수은이 들어갔다고 하니....       

러시아에서 우리가 갔던 교회는 모스크바 외곽 지역이었는데

그 교회와 러시아 문인촌이 아주 가까이 있었다. 

주일 예배 후 가벼운 산책을 겸해서  파스테르나크 생가를 갔다. 

삭막한 도로가 이어지다가 작은 길로 들어서니 갑자기 숲이 깊어졌다.

그리고 그 숲 가운데에 전형적으로 보이는 러시아 주택이 나타났다. 

단순하고 소박한 실내풍경이었는데

러시아 해설사가 있었지만 그의 말을 알아 듣을 것도 아니고 ㅎ

파스테르나크 생가 옆에도  도스토옙스키를 발견(?) 한 동화작가....

이름은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

우리나라 말도 자꾸 잊어가는 사람이 어려운 러시아 이름...을 기억할리 만무하다.

러시아의 방정환 같은 분이라고 하는데

그를 기념한 박물과과 어린이집....아마도 어린이 도서관...이 있었다.

신기하게도 그 박물관 앞 나무에 어린이 신발이 가득 걸려 있었다.

얼핏 우리나라 무당들이 대나무나 커다란 나무들에 걸어놓은 색색의 천들처럼 보이기도 해

혹시 죽은 아이들 신발인가...추론을 해봤다.    

신발을 벗어버린 자유, 

그러나 남는 자에게는 엄청난 고통과 슬픔,

그 회한을 동화를 지어 아이들에게 꿈을 심어준 사람에게 

알린다?. 이양시킨다? 혹은 그에게 울면서 말하고 싶었을까? 

그가 내 아이를 나처럼 기억해주었으면...하는 표현일까?

아니면 신발. 죽음..과 연결된 러시아 특유의 어떤 이콘일수도 있으리,         

생각해보니 파스테르나크는 내게 전혀 생소한 사람이었다., 

그의 소설을 읽은 것도 아니었고 

겨우 소설을 각색한 닥터지바고를 보았을 뿐이며  

영화 속 라라의 테마는 선명하나

눈 쌓인 겨울 장면들...몇이 기억날 뿐이었다. 

<닥터 지바고>를 검색하다가 

 그 안에 마가목이 등장하고 

라라가 마가목 같은 여인이란 표현이 나온다는 글을 읽고

영화를 다시 보았지만

영화 속 어디에서도 마가목은 보이지 않았고

마가목으로 만든 보드카 이야기도 없었다. 

그러니 아마 소설에 나오는 이야기 일 것이다.

내가 본 모스크바의 마가목은 여름 끝이라 주황색이었지만

가을이 깊어 가면 아주 빨갛게 변할 것이다.

선교사님이 물었다. 

‘겨울이 되어 모스크바에 눈이 몇 번이나 내릴 것 같습니까, 한번입니다. 

한번오기 시작하면 그치지 않는다는 이야기죠.’ 

그 희디흰  세상 속에서 빨간 열매라니...

어느 작가라고 그 선명한 열매를, 나무를, 마가목을 등장시키지 않으랴,

나무는 

적어도 꽤 긴 시간 변하지 않는 풍경이다.

끝없이 변화를 기도하며 변화해가는 사람과는 비교할 수도 없이 

나무는 한곳에 서서 그만의 시간을 보내면서 그만이 지닌 풍경이 된다. 

그런 나무를 보며 어찌 정한에 빠지지 않을손가,     

닥터 지바고는 무려 40여년전의 영화인데도 사람에 대해 묻는 영화였다.  

겨울나라 동화 같은 장면이 펼쳐지는 속에서 

라라는 감정에 솔직했고 

지바고는 흐리멍텅한 회색분자였다.

사람의 성향도 문제이지만 사회적 상황을 견뎌내야만 하는 인간, 

주어진 현실에 순응할 수밖에 없는 인간을 나타내주는 영화,  

우랄산맥이 바라보이는 기차 안.

고개도 들 수 없는 낮은 자리에서 밖을 내다보는 지바고의 얼굴은 명랑하고 천진했다.

자연이 그에게 입혀준 표정이었다. 

문득 생각해보니 사람들이 전쟁을 하는 주된 이유는

자연을 바라보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식물도 전쟁을 한다. 

피톤치트를 내보내기도 하며 

태양을 더 쐬기 위해서 옆으로 가지를 넓게 펴기도 한다.

바랭이는 땅이 넓은 곳에서는 옆으로 퍼지며

고구마 순 무성한 곳에서는 고구마 순보다 웃자라 고구마 위에 서기도 한다.

그러나 무리 지어  함께 라는 미명으로 다른 식물에 해를 가하지는 않는다.     

유별나게 외로움을 타 홀로 살수 없는 동물인 사람. 

체온만 나눠도 될텐데    

이즈음엔 아파트 정원에도 그리고 가로수로도 가끔 마가목이 보인다.

흰꽃이 피었다가 초록 열매를 달고 그리고 주황빛으로 익어가다

새빨간 열매를 매단 채 겨울을 맞이한다.

이파리는 조금 날카로워 보이기도 하지만 분위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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