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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생근 Dec 06. 2017

넌 나에게 모욕감을 줬어

크게 데인 일일교사 일기



일일교사 생활 세 달 만에 된통 당했다.

이불속에서 흑흑 울며 온갖 생각을 했다. 나는 좋은 선생님이 될 수 없는 걸까라는 질문부터 시작해서, 내 자아상과, 앞으로의 인생에 대한 불안까지 참으로 큰 진동을 가져다준 강도 높은 지진이다. 전날까지만 해도 '귀여운' 질문들로 룰루랄라 내 '좋은 선생님 되기 프로젝트' 노트를 채우던 참이다. (악!! 지금 보니 제목 무지 오글거려!!)


어떻게 하면 테크놀로지를 사용하는 프로젝트를 효율적으로 운용할 수 있을까?
조별 과제 중 역할분담을 어떻게 도입할 것인가?
건설적인 리워드 시스템은 무엇일까?
아이들에게 푸근한 마음을 주는 일일교사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등등. 하지만 지금은 스파르타식 마음이 되었다. 지금 나의 표정은 전쟁터에 나가기 전 진한 눈썹을 일그러뜨린 전사의 모습이다. 눈빛은 썩었다. 인생아, 넌 나에게 모욕감을 줬어...!




성 엘리자베스 학교 첫날의 기억


사건은 집주인 집 아이들과 신명 나게 카드 게임을 하다 받은 전화 한 통에서 시작되었다. 언제나 그렇듯 나에게 걸려오는 전화는 광고 아니면 내일 일감을 알리는 내용이다. 학교 이름이 나오면 재빨리 위치를 검색한다. 오예! 사십 분 거리의 비교적 가까운 학교다. 교통편도 복잡하지 않아서 좋다. 그렇게 나는 순진하게 'accept' 버튼을 누른 것이다.


그날 아침따라 비가 주룩주룩 와서 천으로 된 단화는 반 이상이 젖었다. 그래도 처음 와 보는 학교이기에 미소를 걸고 마주치는 선생님들과 인사했다. 한 무리의 여교사가 나를 보고 세상 따뜻한 오오라를 뿜는 덕에 비에 젖은 신발이 다 마르는 줄 알았다. 그들은 과한 친절로 서로 내 교실문을 열어주겠다며 다투었다. 나는 얼떨떨하였지만 좋은 게 좋은 거겠지 생각하며 교실로 들어섰다. 높은 천장과 한 면을 가득 채운 커다란 창문이 마음에 쏙 드는 공간이었다. 이런 곳에서 공부하다니 참 복 받은 아이들이네.


담임 선생님의 학습 계획서는 참으로 간결했다. 첫 교시의 반은 체육관에서, 나머지 반은 밖에서 뛰어놀게 하라는 지시다. 되게 간단하네? 하지만 비 오는 날이기에 아이들은 쉬는 시간에도 운동장에 나가지 않고 교실에서 시간을 보낼 터였다. 흠... 그럼 남은 삼십 분을 때울 계획이 필요하겠군... 그리고 이런 날씨이니 애들이 좀 산만하겠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재빨리 아이들 이름을 종이 위에 적고 항상 들고 다니는 클립보드에 끼워 넣었다. 더불어 칠판에 수업태도가 좋은 아이들 이름을 적을 칸과, 남과 자신을 돌아보는 선택을 당부하는 아침 레퍼토리를 도와줄 '인성 지표'를 그리면 준비 완료다.


벨이 울리자 아이들이 교실로 들어오고 항상 하듯 반갑게 아침 인사를 건넸다. 이때까지 아이들은 갓 구워진 빵처럼 따끈한 천사였다. 체육관으로 가는 복도에서 몇 가지를 지도했을 때, 만만찮은 상대임이 드러났다. 보통은 아무리 일일교사라도 몇 번 주의를 주고 스스로의 선택에 따른 불이익을 상기하면 지시에 따른다. 그러나 몇몇 아이들은 교사의 말이 안 들리는 듯 굴었다. 그리고 체육 게임을 할 때 서로의 인격을 깎아내리는 말을 서슴지 않고 내뱉는 게 아닌가.


일일교사에게 가장 힘든 상황이 무엇이냐 묻는다면 바로 아이들의 주의를 끌지 못할 때다. 가르치는 일은 혼자 할 수 없다. 아이들의 호기심이 어린 초롱초롱한 눈과! 듣는 귀가 있어야 선생님이 선생님 될 수 있는 것인데! 투명인간이 될 때, 권위는 고사하고 인격이 부정당한 느낌을 받는다. 아, 당연한 말이라고요?


나: L~~~~ H~P! (Look Here Please. 전달사항이 있을 때 이 반 담임선생님이 쓴다는 구호)

학생: 왁자지껄.

나: L!!! H!! P!!!

학생: 떠들 떠들.

나: LHP!!!!!!!!! (이쯤 되니 내가 마약 이름을 외치는 관심 종자인지 교사인 건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악!!!! 짜식들아~! 너희들 나한테 대체 왜 그러니이~? 이런 경우는 처음이다. 어느 학교를 가도 못한다는 소리는 들은 적 없는 터라 한껏 높아진 나의 자존감 와르르 무너지는 소리, 이 소리 지금 내 귀에만 들린 거지? 물론 아이들 상대이니 기분을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속으로는 멘탈이 깨지다 못해 가루로 빻아지고 있었다.


내가 아는 구호를 모두 사용하고, 고래고래 큰 목소리로 진을 다 빼고 나서야 하루가 끝났다. 어찌어찌 아이들 앞에서 울지 않았다. 화내지 않았다. 그것만으로도 잘했다며 자신을 도닥였지만 위로받아야 할 정신은 병원에 실려가고 없었다. 일을 시작한 이래 뒷정리가 가장 오래 걸린 날이었다. 외상 후 스트레스 증후군에 달달 떠는듯한 정신이를 제자리에 앉혀다 놓고 담임선생님을 위해 아이들 행동 메모를 적는다.


**이는 여러 번 주의를 주어도 학급의 분위기를 흐리는 행동을 했습니다.
XX이는 나쁜 말을 하여 쉬는 시간에 저와 짧은 상담을 했습니다.
00 이가 @@친구 물통을 화장실에 버리는 일이 있었습니다. 학생들을 버스로 인도해야 하는 시간이라 자세히 살펴볼 수 없었습니다. 내일 이 두 친구를 확인해 주세요.


비척비척 교실 정리를 하는 사이 하늘빛은 어둑해지고 청소부 직원이 다녀갔다. 불 꺼진 사무실에 교실 열쇠를 올려놓고 나오는데, 아침에 봤던 선생님 한 명이 측은한 얼굴로 "We hope to see you again!" 하며 쓱 지나갔다. 텅 빈 학교를 뒤로 하고 나서야 아침의 부자연스러운 환영이 의미하는 바를 깨달았다.




이것이 한 달 반 전의 일이다. 이후 나는 성 엘리자베스 학교에서 전화가 오면 오기로 수락했다. 유튜브에서 무서운 선생님 영상까지 공부 해 가며 전사의 마음으로 맞서고자 했다. 그리고 사람들을 알게 되었다. 지금까지 방문한 어느 학교보다 선생님의 연대가 깊고, 일일교사를 대하는 태도가 정중했다. (이상하게 놀랍지가 않네...) 내가 얼굴을 비추기 시작하자 "오, 또 왔네요?" 하며 그저 웃는다. 소문을 듣고 보니 이곳이야 말로 inner city school이었다. 여전히 쉽지 않지만 그렇다고 첫인상만큼 '괴물들이 사는 나라'는 아니었다.


아이들은 여전히 아이들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친구들과 장난치고 떠들기 좋아하고 새로운 일에 흥미를 가지는. 가끔씩 소악마의 역할까지 탐을 내서 문제지. 그저 서로에게 친절을 베풀 줄 아직 모르거나 여유가 없는 아이들이 많을 뿐이다. 정중한 말보다는 사나운 목소리에 반응한다. 선의보다는 두려움으로 순종하는 일에 익숙한 아이들을 보며 새로운 고민을 하기 시작한다.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헷갈릴 때

#1

실화. 난 화내고 싶은데 귀여우기 있기 없기?




#2


어떻게 보면 참 웃기는 일이지만 한 아이가 "Shout already, that's how we listen!"이라고 말했을 때, 집에 와서도 마음이 시큰하고 무언가 걸린듯한 기분이었다. 누군가 소리지르기 전, 정중하게 부탁했을 그때부터 선택권은 있다. 하지만 어째서 구태여 사나운 감정을 실어야 따르는 것일까. 어떻게 보면 폭력적이고 강압적이기까지 한 '체제'를 바라는 태도가 이해되지 않는다. 아직은. 권위를 쉽게 인정하지 않는 모습은 더욱 강력한 권위를 바라는 모습으로 해석된다. 그들이 정말로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 하루 보고 말 나 같은 일일교사는 '맡겨진 일을 완수하기 위해' 무서운 사람이 되어야만 하는 걸까? 이런 상황에서 아이들과 교감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3

본격 선생님께 반항하는 학생 보고 기분 좋아지는 교사


인간적인 교수법과 비인간적인 교수법 사이에서 고민한다. 규칙을 지키도록 상과 벌이라는 '조련'식 전략을 써야만 한다. 무언가를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서로를 위하는 좋은 마음으로 규칙이 지켜지면 얼마나 좋을까. 규칙의 본질은 상대를 위한 배려이니까.


그러나 결국 인간적이거나 비인간적이라는 나의 잣대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나조차 말만큼 막연한 '좋은 마음'으로 살지 않는다. 득실에 근거해 결정을 내린다. 득과 실이란 다른 말로 상과 벌이 아닌가? 상과 벌을 주는 주체가 부모나 선생님 등 권위 있는 누군가에서 삶 또는 사회로 바뀌었을 뿐이다. 나조차 지키지 못하는 높은 기준으로 아이들은 판단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설교를 들을 때, 세미나 실에서, 또는 그룹 토의 중 다른 이의 말을 들을 때, 나에게 새롭거나 흥미 있는 내용이 아니면 나는 어떻게 행동했던가? 나는 나 자신을 속이는 법을 터득했으나 아이들은 제 마음이 드러나게 내버려 둘 뿐이다.


이 세상 사람들의 수만큼 세상에는 다양한 유형의 동기가 존재한다. 따라서 나의 기준이 절대적으로 상위에 있다 말하면 안 된다. 어떤 이에게는 손에 잡히고 눈에 보이는 무언가가 중요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아이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의 다양한 동기를 존중해 주어야 한다. 모든 사람을 만족시킬 수는 없지만, 최대한 여러 사람의 입맛에 맞는 메뉴를 차리는 일이 나의 몫이다. 재미있는 것이 중요한 아이, 의미 있는 일이 중요한 아이, 보상이 중요한 아이 등 많은 학생이 좋은 하루를 보낼 수 있도록 계속해서 나의 프로그램을 꾸린다. 그러니까 왕왕 짖는 기선제압도 나름의 역할이 있는거지, 암암.


교사 일을 하며 나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아이들에게는 규칙을 지키라 윽박지르며 정작 자신은 흐트러진 삶을 살 수는 없다. 아이들의 동기는 인정해 준다 하며 내 주변 사람들에게 내 잣대를 들이미는 일도 말이 되지 않는다. 그러니까, 정말이지 나는 완벽한 사람이 아니다.



글, 그림 상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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