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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생근 Dec 05. 2018

이십 대 후반의 원점

느린 걸음에도 나름의 이유가 있다


가족과 살던 어느 여름밤, 한국에 가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목적은 가족과 떨어지는 거였다. 하지만 취직이 되어 그 꿈은 생각보다 금방 이루어졌다. 일 년간 일일 교사로 일하던 어느 겨울밤엔 생계 걱정과 떨어지고 싶어 졌다. 선생님이 되어가는 나의 모습을 보면서, 창작자인 나는 어디에 있는지, 되찾을 수 없는 곳에 가 있는 건 아닌지 조바심이 났다.


나는 사실 미술 대학을 졸업한, 동화작가가 꿈인 사람이다. 이런저런 이유로 일일 교사도 하게 되었지만 말이다. 욕심이 많아서일까, 아니면 한 가지를 오래 못하는 성격 이어서일까. 살아온 행적을 보아도 난 한 장소에 오래 머무는 법이 없다. 태어나기는 미국에서, 자라기는 한국에서, 사춘기는 피지라는 열대 섬나라에서, 그리고 사춘기 제2탄은 추운 캐나다 땅에서다. 대학은 미국에서 나왔으며, 다시 캐나다 여러 곳을 전전하다 사회생활을 시작한 지 겨우 일 년. 나는 한국으로 도망가고 싶어 졌다.


이십 대 중반을 보낸 캐나다는 모든 것이 아주 조용하고도 느리게 흐르는 나라다. 그들은 한국 사람처럼 열심히 살지 않는다. 적당히 일하고 적당한 시간에 집에 돌아와 가족과 오붓하게 저녁을 보내는 게 미덕이다. 그들은 조깅하듯 살며 주변 경치를 즐기는 사람들이다. 한국엔 길 곳곳에 허들이 놓여있다. 사람이 너무 많아서 걸러내려고 놓아두었단다. 저만치 다가오는 허들을 보고 산책하듯 걸을 수는 없다. 한국 사람들은 있는 힘껏 뛴다. 그 모습은 처량하기도 하고 멋져 보이기도 했다. 나는 그들이 뛰어가는 소리를 귀 기울여 듣는다. 그래서인지 캐나다 사람들보다는 빠르게 걷는 편이다. 그래도 한국인의 속도에 미치지 못한다는 생각을 항상 한다. 뜻 모를 죄책감이랄까, 재촉을 느낀다. 더, 빨리 가야지. 나는 새로운 흐름을 느끼고 싶었다. 한국에 사는 사람들과 비슷해지고 싶었다. 왜인지는 모른다. 멋있어 보인다고 생각해서였을까.


어쨌든 나는 일일 교사를 하며 모은 경비로 캐나다의 느린 흐름에서 자신을 잠시나마 건져낼 수 있게 되었다. 한국은 7년 만이다. 할머니 댁은 서울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다. 치열하게 사는 모든 사람이 모인 서울, 모이고 시도하기를 그치지 않는 도시에 나를 물들여 보고자 바쁘게 움직였다. 나는 작업실을 구하고, 책방을 돌아다니고, 미술관에 갔다. 그림책 기획 학원에 등록하고, 여러 강연을 청강하고, 즐겨 듣던 팟캐스트 녹음 현장에도 가보았다. 책을 펴낸다고 충무로를 누비고 다닌다. 내가 8월에 북촌 한옥마을에서 한복을 입고 돌아다녔다고 하면 사람들은 헉 숨을 들이켰다. 111년 만의 그 더위에? 나는 한순간도 허비하고 싶지 않았다. 가능한 한 많은 경험을 하고 싶다.


캐나다에서 살던 모습과 너무 달라서 자신도 놀란다. 학교 일이 끝나면 유튜브를 뒤적이거나, 낙서하거나, 책 읽던 일이 전부였던 나는 그때쯤 전환기를 지나고 있었다. 불편하게 삐걱대던 내 삶이 점점 안정을 찾고 있었다. 수월하게 살고 싶어도 그럴 수 없었는데, 이제는 가능할 것 같다. 때마침 모두가 빠르게 걷는 한국에 왔으니 속도가 맞았다고 생각한다. 




내가 철들고 처음 인지한 건, 내 마음이 온전치 못하다는 사실이었다. 누군가는 쉽게 하는 일을 난 잘하지 못했다. 특히 인간관계에 있어 무언가 모자랐다.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글을 썼다. 화나는 일이나 답답한 순간이 찾아올 때면 연필을 들었다. 동생은 어릴 적부터 내 일기장을 훔쳐보는 버릇이 있었는데, 참 이상한 자식이다. 내 일기장엔 그 애를 욕하는 말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나이가 들수록 나는 동생 얘기보다는 내 안에 해결되지 못한 일에 대해 더 많이 썼다. 비교하는 마음, 미워하는 마음, 부자연스러운 내 행동, 인정받고 싶은 욕구 등 대부분 타인과의 관계에서 나타난 나의 모자람에 관한 내용이었다. 나는 그것들을 찾는 일에 모든 신경을 쏟았다. 그 지리멸렬한 작업을 거듭한 끝에 나는 내 걸음이 불편했던 건, 울퉁불퉁하고 추한 자신의 몸 때문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누군가 얹어놓은 짐 탓이었다. 나도 모르는 새 무언가가 묶어 놓은 크고 작은 짐. 내 타고난 기질을 양분 삼아 기괴하게 자라난 그 모습을 보고 자신이 참 못났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보이는 모든 게 나의 본질은 아니었다.


나는 짐 푸는 방법은 몰랐지만 풀어 줄 사람은 알았다. 그의 앞에서 내 짐에 대해 불평한 지도 십 년이 넘었다. 그렇지만 처음 만난 순간부터 그가 내 짐을 하나둘 풀어놓고 있었다는 걸 나는 몰랐다. 나는 그에게 달려가서 왜 더 빨리 모든 짐에게서 날 해방해 줄 수는 없냐고 따지기도 했다. 그래도 그는 천천히, 그러나 꾸준히 짐과 나를 분리했다. 지금 돌아보면 내가 다치지 않길 바라는 마음이었다.


이걸 깨달았을 때, 나는 인생의 원점에 선 기분이었다. x와 y 값이 항상 마이너스였던 그래프가 (0, 0)의 지점에 도달했다. 또는, 머릿속에서 항상 나를 깎아내리고 혼내던 그 목소리가 사라졌다. 또는, 이제껏 물속을 걷다가, 땅에 발을 탁, 하고 디뎠다.


그 믿을 수 없는 순간이 왔을 때, 나는 제일 먼저 내가 하고 싶은 걸 할 자유가 생겼다는 걸 느꼈다. 이상하게도 나는 내가 하고 싶은 걸 못 하는 사람이었다. 그림책 작가가 되고 싶었지만, 지금까지 어느 출판사에도 투고해 본 적이 없다. 꾸준히 그림을 그리고 이야기를 구상했지만, 남들 눈에 띄지 않게 했다. 왜 그랬는지 물어도 나는 정말 모르겠다. 지금까지는 내가 게으르고 일 못 하는 탓이라 생각했다. 마이너스의 영역에서 벗어난 내 모습을 보았다. 찬찬히 다시 보았다. 나는 내가 무언가를 이룰까 봐 두려웠다. 완벽하지 않은 채로 남 앞에 서는 걸 용납할 수 없었다. 발견되고 싶지 않다. 그건 창작자로서의 나였다. 찾았다. 여기 숨어 있었구나! 너!




'요새 여러 가지 시도하는 널 보면 대단한 거 같아.'

친구가 카톡을 보냈다.

'캐나다가 하도 뭔 일이 없는 나라라 갈증이 커졌나 봐. 난 원래 이것저것 도전하는 성격이 아닌데, 억눌려 있던 갈증이 폭발했나 봄.'

답장을 보낸 후 나는 내가 한 말을 곰곰이 되새겼다. 캐나다에서 살았기 때문에 덜 열심히 살았다는 건 아무 말 대잔치였을지도 모른다. 내가 한국물을 좀 먹어서 바쁘게 돌아다니는 게 아닐 수도 있다. 한국에 온 날이, 내가 땅을 밟고 올라선 시점과 교묘히 일치해서 그런 거다. 그 증거로 이렇게 모자라는 글로 책을 만들어 보겠다고 용쓰고 있다. 그리고 또 다른 증거로, 난 캐나다에 돌아가서도 아마 총총 뛰어다닐 거다. 내가 원하는 자리에 허들을 세우고.


음,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




글, 그림 상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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