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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상은리 Dec 28. 2018

이번 생은 글렀섬의 병자

계속되는 실패의 의미는 무엇일까? 불완과 불안

나에게는 병이 있다. 끝마치지 못하는 병. 만성질환으로 사춘기 때부터 앓던 병인데, 치료 방법도 원인도 모르겠고 그냥 이대로 살다 죽자 싶다.


어릴 때부터 그림 그리는 것으로 내 생각을 표현하는 일이 좋았다. 경쟁을 싫어하고 소극적인 아이가, 미술 시간만 되면 다른 친구들보다 잘하고 싶어서 투지를 불태웠다. 당사자인 내가 봐도 미술에 관해서는 관심 종자로 변하는 자신이 이상했다. 남들과는 다른, 특별한 무언가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에 지배당하는 시간이었다.


나만의 바람개비를 만드는 과제를 할 때였다. 초등학교 저학년이었던 나는 김말이같이 생긴 이상한 물건을 만들어냈다. '바람이 불면 돌아간다'라는 바람개비의 공학적 역할을 감당하지 못하는 예쁜 쓰레기였다. 하지만 나에게는 바람개비의 기능성보다는 남다른 사고를 보여 주어야 한다는 욕구 표출이 더 중요했다. 그러므로 나는 그 우스운 디자인에 파워 당당했으며, 바람개비의 설계보다는 자연의 섭리에 의문을 품었다. 이렇게 멋진데 왜 작동이 안 되지?


이랬던 나인데. 이제는 프로젝트 하나를 기획하고 완성하는 일이 벅차다. 중도 포기는커녕 준비하는 과정에서 접어버리는 경우도 많다. 새로운 구상이 떠오른 처음 며칠간은 설레어서 잠도 못 자지만, 이내 가슴은 두려움으로 빠르게 뛴다. 내가 할 수 있을까? 이번에도 지난날처럼 얼마 못 가 그만두고 말겠지…. 이 시간에 차라리 돈을 버는 게 나을까? 생각이 봇물 터지듯 흘러나온다. 눈앞에 끝없이 펼쳐진 지평선, 어디든 갈 수 있을 것 같았던 대지가 물에 잠긴다. 어디서 흘러들어온 물일까. 나는 망망대해 속 작은 섬에 덩그러니 앉았다.


영화 '캐스트 어웨이'에서 주인공 척은 항공 사고로 무인도에 고립된다. 한참 구조 신호를 보내던 중, 저 멀리서 배가 보인다. 흥분한 그는 무작정 바다에 뛰어들었다. 그러다 섬과 바다 경계에서 몰아치는 파도에 휩쓸려 크게 다친다. 죽을 고비를 넘긴 척은 그럭저럭 섬 생활에 적응해 간다.


나는 완성이라는 새로운 영토에 도달하고 싶다. 그러나 척과 마찬가지로 불안의 파도를 넘지 못하고 '이번 생은 글렀'섬으로 돌아가 질질 짠다. 별것 없는 섬이지만 그래도 바다에서 고생하는 것보다 낫다는 말로 자위한다.


무언가를 완성해 보는 일은 내 몸과 기억에 새로운 기본값을 설정한다. 내 인생의 항로에서 새로운 섬을 발견하는 일과 같다. 아무리 하찮은 완성도 지도에 점 하나를 기록하는 역사적인 순간이다.  새로운 세계 하나가 열리고 처음 보는 사람들을 만나 새로운 걸 배운다. 금전적인 보상이 따라오기도 한다. 그렇게 그 섬을 거점으로 더 멀리 항해할 기반을 다진다.


갇혀 있던 섬을 떠나기는 했으나 완성에 도달하지 못하는 때도 있다. 섬의 경계를 이루는 사나운 불안을 넘었지만 새로운 영토가 눈에 보이기 전까지는 긴장을 놓을 수 없다. 바다에 고립된 채 자원이 모자랄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항로를 기록하며 앎의 지평을 넓히는 일은, 아직 어떠한 물질적인 도움도 되지 않는다. 이러다 식량이 떨어지는 것은 아닌지 불안해 미칠 것만 같다. '이번 생은 글렀 섬'이 보장하는 안락한 삶, 언제 해일이 덮칠지 모르는 그 불안하고도 달콤한 허상을 그리워하게 된다.


내가 새로운 섬에 도달하기도 전에 포기하는 이유가 뭘까? 새로운 항로 개척에는 재능이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섬 발견까지 버티지 못하는 나의 정신력이 야속하다. 이러다가 '이번 생은 글렀'섬에 정말 내 생을 묻어버리게 되는 건 아닐까? 그래도 출항은 부지런히 한 편인데…. (그 수만큼 회항을 해서 문제지만.) 실패를 반복하다 보면 어떤 비결이 생긴다. 나는 실패의 패턴을 분석할 수 있는 경지에 다다랐다. '이번 생은 글렀'섬에 오래 거주하다 보면 누구나 이런 초능력 하나쯤은 가지게 된다.

내 능력을 못 믿음
내가 하는 일의 의미를 모르겠음
남들 반응에 신경 씀

이 삼합이 차려지면 나는 불안감에 시달렸고, 번갯불에 콩 볶아먹듯 배를 돌리고 말았다. 나는 창작자로서는 작은 섬 하나밖에 가지지 못했다. 아, 바다를 아주 숙련되게 헤매는 솜씨도.






이렇게 또 한 번의 실패를 겪으면 나는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이야기에 파고든다. 영화, 만화책, 드라마, 소설, 동영상… 그게 뭐든 상관없다. 내 주의를 못난 자신의 모습에게서 돌릴 수만 있으면 된다. 그리고 자아를 해체하는 여러 활동 중에는 유튜브만 한 특효약이 없다. 전 세계 동영상을 전부 볼 때까지 끝나지 않을 '관련 동영상'과 '다음 동영상'과 '추천 동영상'의 향연에 몸과 마음을 빼앗긴 지 몇 시간이 지났을 때, 나는 어느 아이돌 그룹의 구성원이 올린 영상을 보게 되었다. 소속사의 사정으로 인해 얼마간 활동을 하지 않는 그룹이었다. 그는 공식 활동을 할 수 없는 상태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콘텐츠를 생산하고 있었다. 소속사와의 갈등을 음악으로 풀어내기도 했다. 이런 생명력을 마주하면, 온 힘을 다해 도망쳤던 내 모습이 딱 기억나 버린다. 실패의 아픔을 오래 느끼고 싶지 않아서 급하게 훠이훠이 쫓아내 버린 내 속 사람. 얼마나 힘들었을까, 그래도 그 마음으로 무언가를 만들어 냈구나. 누군가 말을 건다.


이렇게 현실을 마주할 힘을 주는 사람을 나는 아티스트라고 부른다. 창작물 하나하나의 완성도도 중요하지만 작품과 작품 사이를 잇는 그들의 행적이, 삶의 모습이 만들어내는 맥락은 더 큰 힘을 가지고 있다. 손으로 직조물을 짜는 작업과 마찬가지로,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지 않으면 어떤 반복하는 패턴이 나타날지 알 수 없다. 작가가 꾸준히 살아 남아 작품 활동을 한다면 그가 대중에게 건네는 메시지의 본새는 한층 깊은 삶의 의미를 머금게 된다. 한두 가지 예쁜 실은 짧은 탄성을 부를 수 있겠지만, 누군가의 마음속에 오래오래 기억될 이미지나 이야기는 아직 아니다. 마찬가지로 누군가의 빛나는 재능이나 아름다운 작품이 단발적이라면 세상은 그로부터 큰 의미를 얻을 수 없을 것이다. 이렇게 보면 아티스트는 타고 나는 수밖에 없는 것 같다. 소통하고자 하는 욕구가 기본적으로 탑재되지 않고서야 어떻게 기쁠 때나 슬플 때나 무언가를 만들어 낼 수 있단 말인가. 아티스트가 그렇게 본능적인 존재라면, 나의 비루한 초능력으로 해석해낸 '실패 삼합'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나는 가짜 아티스트인 게 틀림없다.





완성이라는 섬이 실재하기나 한 건가? 아티스트가 아닌, 혜성처럼 나타났다 사라지는 아이돌 가수를 떠올려 본다. 그들은 하나같이 예쁘고 멋지다. 피부에는 티 하나 없고, 근육은 탄탄하다. 재능도 탁월하며 무엇보다 (나타나 보이기에) 자신만만하다. 누구나 아이돌처럼 선망의 대상이 되는 상상을 해본다. 그 뒤에는 완벽성을 부추기는 미지의 힘이 있다.


우상은 최고로 아름답게 다듬어진 모습으로 존재한다. 더는 성장할 필요가 없다. 어떠한 공격이나 변화로부터 안전한 상태이기 때문에 우상은 변하지 않는다. 언제나 확실한 상태에 있다. 사람들은 이런 속성에 쉽게 끌린다. 타인의 호의를 사는 외모, 천부적인 재능, 좋은 성적, 안정된 수입, 보장된 노후 등 이름은 다르지만 모두 인생의 불확실함으로부터 자신을 지키는 보호 장치다.


하지만 우상은 나를 온전하지 못한 존재로 인식하게 만드는 도식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우상의 모습과 제 모습 사이의 거리를 재어보며 박탈감을 느끼거나, 자기보다 갈 길이 먼 사람들을 보며 우월감을 느낀다. 그러나 조금만 생각해 보면 우상은 허상일 뿐이다. 죽을 때까지 불안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신의 불완전함을 노래하는 사람들이 필요하다. 언젠가 나도 우상이 될 수 있다는 달콤한 착각에서 깰 수 있도록 말이다. 선망의 대상이 아닌, 때로 초라한 자신인 채로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할 때, 뭐라도 할 때, 사람들은 그 모습에 위로받는 게 아닐까? 소속사와의 갈등을 음악으로 엮어낸 그를 본 내 마음처럼. 누군가의 목표가 아닌 동반자로서 살고 싶어 진다.


희망을 주는 이들의 공통점은 끊임없이 변한다는 것이다. 더 깊어지고 성숙하는 방향으로 간다면 좋겠지만, 죽을 때까지 어떤 모습일지 모르니 섣부를 판단은 하지 않기로 한다. 변화를 표현한다는 것은 자신이 고민하고 있다는 걸 숨기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하다. 욕망의 대상으로 머무는 걸 꾸준히 부인하려면, 용기가 필요하다.






김말이 바람개비를 만들던 시절, 내 섬은 대륙 정도 컸을지 모른다. 아니, 작은 내가 보기에 그랬을 것이다. 아직은 경계를 모를 때다. 여러 풍파를 맞고 무언가가 나를 콩알만 한 섬에 가두었다. 딱 내 자존감만 한 그곳에. 나로 사는 게 너무 힘들어서 그만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출처를 모르는 부정적인 말들이 내 머릿속을 가득 채우기 일쑤였다. 숨어있는 그들을 몹 잡듯 지지부진 캐내었다. 그리고 근래 들어 그 거슬리는 울음소리가 사그라드는 것을 느낀다. 그리고 '이번 생은 글렀'섬에 사는 주민의 행실은, 조금 달라졌다.


뭐 꼭 완성에 도달해야 하는 건가, 후비적. 그리고 내 섬 이름을 누가 이렇게 지은 거야? '이번 생은 걍 이렇게 생겼'섬이나, '난 원래 이렇'섬… '이 정도면 핸'섬으로 바꿔도 괜찮을 것 같은데... 꼭 긴긴 항해를 해야 새로운 섬을 얻을 수 있을까? 힘을 좀 빼면 불안이라는 파도가 가라앉고, 수면이 낮아져서 없던 섬이 뿅 생길지도 모른다. '조수 간만의 차.' 내 새로운 초능력이다. 그게 아니면, 바닷속 모래를 파서 그걸로 섬을 지어도 되지 않을까? 지금 내가 하는 것처럼, 우울과 불안을 파고 들어가다 보면 책 한 권 분량의 섬은 뚝딱이잖아. 자, 이렇게.


완벽해야 한다는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기에 아직은 세상과 소통할 수 없었는지도 모른다. 자꾸 우상이 되려 하는 내 뒤통수를 누가 좀 때려주었으면 좋겠다. 아주 오만방자한 놈이 여기 있다고. 난 자주 우상과 이상을 혼동한다. 이상은 '내가 언젠가 될 수 있는 누군가'가 아닌, '내가 언젠가 될 수 있는 나' 이기에 그 모습이 어떨 것이라고 감히 스스로 정의할 수 없다. 나는 끊임없이 변하기에. 대충 이런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하고서, 아는 게 별로 없는 나는 오늘을 그저 열심히 살기로 한다. 그럼 조수 간만의 차이든 천재지변이든 죽을 때쯤엔 크고 아름다운 섬이 만들어져 있을 것만 같다. 항해를 떠나서 새로운 이를 만나도 좋겠지만, 꼭 가야만 한다며 자신을 괴롭히는 일도 줄이고 싶다. 그렇게 살다가 '멋진 할머니' 섬이라고 마지막으로 이름 붙이고 떠나는 게, 일부러 아-주 추상적이게 정한 현재 나의 이상이다. 내가 지금 잘못 생각하고 있는 거라면, 미래의 내가 또 고쳐주겠지 뭐. 그리고 인생의 큰 진리를 찾아낸 양 이런 글을 또 쓰고 있겠지 뭐. '이번 생은 글렀'섬의 주민은, 확신하지 않는 것이 가장 확실한 미덕임을 깨닫는 쾌거를 이루어냈다.



글 그림 상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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