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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 파나마 파나마시티

Ahorita and Other Delays

어떤 약속은 깨지지 않는다. 다만 공중에 매달린 음표처럼 흔들리며, 끝나지 않은 채 머무른다.


“Ahorita vengo.”


어머니가 구멍가게에 가실 때마다 하던 말이 있었다. 문은 열려 있었고, 바람이 틈새를 통해 들어왔다. 나는 타일 바닥에 엎드려 장난감을 굴리며 기다렸다. 어떤 날은 다섯 분, 어떤 날은 서른 분. 나는 ‘ahorita’의 의미를 묻지 않았다. 이미 기다리면서 자연스럽게 배워버렸기 때문이다.


우리는 콜론에 살았다. 개들은 저녁마다 서로 대화하듯 짖어대고, 고양이들은 한낮의 더위 속에서 늘어졌었다. 오후의 공기는 촉촉했고, 벽은 땀방울이 맺히듯 축축했다. 셔츠는 등에 붙었고, 부엌의 냄비는 은은한 불 위에서 천천히 끓었다.


“그가 금방 온다고 했어. Ahorita.”


아버지는 시계를 보며 말했다. 길 건너 동료가 서류를 가져오겠다고 약속했지만, 그는 다음 날에야 나타났다. 아버지는 화내지 않고 커피를 마시며 기다림을 자연스러운 일로 받아들였다. 파나마에서는 ‘ahorita’가 날씨처럼 늘 변하는 것처럼, 우리가 바꿀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학교 안에서는 달랐다. 종이 울리고, 수업표가 있었으며, 지각에는 벌이 따랐다. 그러나 교문을 나서는 순간 시계는 멈췄다. 바늘은 멈추고, 시간은 느릿느릿 흐르며 흩어졌다.


“¿A qué hora viene el bus?”(버스는 언제 오나요?)

정류장에서 묻자, 할머니는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Ahorita llega, mi amor.”(곧 온다, 내 사랑아.)


그 말에는 변명이나 비꼼이 없었다. 오직 수용만 있었다. 세상은 계속 움직이지만 내 뜻대로만 흘러가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말투에서 존재란 완벽함이 아니라 함께하는 태도임을 알게 되었다.


나는 공원 옆에서 타말레를 팔던 여인을 기억한다. 그녀는 매주 토요일마다 나타났지만, 비가 오거나 손녀의 발표회가 있을 때는 오지 않았다. 그녀는 미안하다고도 하지 않았고, 대신 이렇게 말했다.

“Hoy no se pudo, pero ahorita nos vemos.”(오늘은 안 됐지만, 곧 보자.)


아무도 다그치지 않았고, 몇 시인지 묻지 않았다.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허기를 참았으며, 결국 손에 쥔 타말레가 더욱 소중하게 다가왔다.


내 앨범에 오래된 사진 한 장이 있다. 빗속에서 젖은 얼굴과 어깨에 걸친 수건. 울기보다 기대하는 표정이다. 나는 그 사진을 보며 묻는다. 나는 무엇을 기다렸을까? 아버지의 귀가였을까, 이웃의 노크였을까, 소나기 끝이었을까. 분명한 건, 기다림이 나를 인내심으로 이끌었다는 점이다.


한국에 돌아온 이후로 시간 엄수를 중요하게 여기게 되었다. 조금이라도 늦으면 반드시 사과해야 했다. 지연은 잘못으로 간주되었지만, 파나마에서는 달랐다. 지연은 죄가 아니었고, 늦더라도 “잊지 않았다”는 눈짓, 과일 한 조각, 기다림 끝에 피어나는 미소가 있었다. 이런 작은 행동들이 지연을 더 친밀하게 만들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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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년 만에 다시 찾은 파나마는 여전했다. 버스는 늦었고, 라스파도를 팔던 남자는 천천히 시럽을 저었으며, 빵집 계산원은 계산보다 먼저 안부를 물었다. 어느 날 나는 카페에서 친구를 기다리고 있었고, 그는 약속보다 30분 늦게 도착했다. 의자에 앉으며 물었다.

“¿Pediste algo?”(뭔가 시켰어?)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기다렸어.”


그는 웃으며 말했다.

“Entonces, esperaste bien.”(그래, 잘 기다렸구나.)


그 말은 오랫동안 남았다. 인내하며 기다린다는 것, 조급해하지 않고, 의무가 아닌 은총처럼 받아들이는 것. 파나마의 'ahorita'는 단순한 시간이 아니었다. 그것은 하나의 리듬이었으며, 만남과 만남 사이의 여백, 대답하기 전의 침묵, 그리고 언젠가 이루어질 것이라는 믿음이었다.


지금도 자녀들이 “아빠, 언제 밥 먹어요?” 하고 물으면, 나는 의식적으로 대답한다. “Ahorita.” 곧이 아니라, 지금도 아니고, 내일도 아닌 것. 기다림으로 초대하는 말. 모든 것을 시계가 지배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다.


나는 파나마에서 배운 것을 떠올린다. 어떤 장소에서는 시간은 멈추지 않는다. 망설이고, 머뭇거리며, 돌아서면서 사람들에게 잠깐의 여유를 준다. 그래서 나는 여전히 자신에게 묻는다. 우리가 모든 초를 세기 시작할 때, 무엇을 잃는가. 기다림을 잊을 때, 마음은 어떤 것과 함께 사라지는가.


04 <멕시코 과달라하라시>를 기대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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