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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멕시코 멕시코시티

¿Ya comiste?

by 유엔이방인 김상엽

내 기억 속의 안뜰은 희미하지만, 빛만은 아직도 또렷하다. 격자창과 무화과 잎 사이로 비치던 빛, 붉은 점토 타일 위에 오래 머무르던 따사로움. 그 빛은 하루의 시간을 알려주는 시계 같았고, 동시에 어릴 적 마음을 감싸던 손길 같았다.


나는 여인들이 마루를 쓸던 소리를 기억한다. 빗자루가 돌바닥에 부딪히는 규칙적인 소리와 숨결 같은 리듬. 문간에 늘어져 졸던 녹슨 빛의 개도 떠올린다. 그 모든 풍경 위에는 매일 같은 말이 흘러나왔다.


“¡Ya comiste, mi amor?” — 밥은 먹었니, 내 아이야?


반쯤 웃고 젖은 행주를 잡은 손과 금이 간 조리대 위로 흘러나던 목소리. 의미는 몰랐지만, 그 말이 내게 남긴 감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한국에서는 아이에게 “어디 가니?” 또는 "숙제했니?"라고 묻는 경우가 흔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 낯선 도시에서는, 앞치마를 두른 이웃들이 항상 건네는 말은 같았다. “밥은 먹었니?”


그것은 단순한 식사 제안이 아니었다. 존재를 인정하고 무시하지 않겠다는 약속이었다. 밀가루가 묻은 손으로 부르며 “Mira, pan dulce."라고 말했을 때 달콤한 빵을 건네던 장면. 소금을 뿌린 망고 조각과 젖은 빨래 사이로 흘러나온 웃음까지 모두 같은 의미였다.


“너는 여기 있다. 너는 소중하다. 나는 널 보고 있다.”


나는 뒤늦게 알게 되었다. 우리는 폴랑코 근처의 집에 살았고, 우리 동네로 마르타는 매일 새벽 타말레를 팔러 왔다. 그러나 내가 떠올리는 건 구조나 거리 이름이 아니었다. 젖은 안뜰의 냄새, 빨랫줄에 걸린 흰 셔츠들, 그리고 그 위를 덮었던 목소리의 리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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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마르타는 무릎을 굽혀 내 눈높이에서 물었다.

“¡Ya comiste?”


갈라진 손과 라드, 라벤더 향기, 삶의 그림자가 드리운 얼굴. 나는 말없이 있었지만, 그녀는 웃으며 내 턱을 가볍게 만졌다.

“괜찮아. 오늘은 눈이 슬프네.”


그 말은 여전히 내 마음속에 남아 있다. 이어서 손에 쥐어진 따뜻한 아레파의 촉감까지 함께. 나는 몰랐다. 그녀가 먼저 남편을 떠나보냈다는 것과 아이가 없었다는 사실을. 오직 알았던 것은, 매일 반복되는 질문 속에 담긴 그녀의 다정한 끈기였다.


나는 나중에 깨달았다. “밥은 먹었니?”라는 질문은 단순한 말이 아니라 문화적 의미를 담고 있었다. 가난과 넘침 속에서도, 누군가를 외면하지 않겠다는 의지에서 비롯된 인사였다.


멕시코를 떠난 뒤에야 알게 되었다. 이 질문이 더 이상 나오지 않을 것이라는 걸. 영어의 “How are you?”는 단지 형식일 뿐, 실제로는 체온이나 의미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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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에서 유엔 회의에 참석했을 때, 유창한 연설들이 이어졌다. “경의를 표한다.” “환영한다.”라는 익숙한 표현과 절제된 언어들이었지만, 나는 한 가지가 빠졌음을 느꼈다.

“밥 먹었어요?”


그 말이 빠지면 부드러움, 겸손, 그리고 안심 같은 중요한 것들이 사라진다. 그래서 나는 아이들에게 영어로라도 묻는다. “Did you eat?” 아이들은 그 의미를 몰라 고개만 끄덕일 뿐이다. 그 말이 근본적으로 무화과 잎을 덮은 정원, 젖은 앞치마, 마르타의 목소리에서 나온 인사라는 사실을.


그러나 나는 안다. 가장 두려운 순간이나 길을 잃었을 때, 내 귀에 다시 들려오는 목소리가 있다.

“¡Ya comiste, mi amor?”


그럴 때 깨닫는다. 소속감이란 여권의 발급지나 언변의 능숙함이 아니라, 누군가의 물음에 대한 답이라는 것을. "밥은 먹었니?" "배는 부르니?" "누군가 널 기억하니?"


나는 스스로에게 묻는다. 이 말을 한국어로 옮길 수 있을까? 배고프지 않아도 먹여주는 마음, 이름을 묻지 않고 바라봐주는 시선, 팔이 아닌 언어로 안아주는 감정.


나는 아직 답을 찾지 못했고, 그래서 계속해서 묻는다.


03 <파나마 파나마시티>를 기대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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